"소방수도 실패…매각이 최선" 알짜 계열사 내놓는 일진그룹

머티리얼즈·디스플레이 매물로
'믿을맨' 투입에도 실적개선 요원
해외공장 등 투자 부담도 커져

매각 땐 그룹 시총 60% 감소
"허진규 회장 은퇴 수순" 관측도
“인공호흡기마저 떼기로 마음을 굳힌 겁니다.” 허진규 일진그룹 회장이 최근 그룹 계열사 일진디스플레이 매각을 추진하고 나서자 일진그룹에 정통한 재계 관계자는 4일 이같이 말했다. 그는 “‘소방수’도 불러보고 증자도 하고 이것저것 다 해봤지만 매각 외엔 실적 부진에서 탈출할 뾰족한 수를 찾지 못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앞서 일진그룹은 허진규 회장과 특수관계인, 계열사가 보유 중인 유가증권시장 상장사 일진디스플레이 지분 43.19%의 매각 의사를 사모펀드(PEF) 운용사 등에 전했다. 경영권프리미엄을 포함해 1000억원가량이 매각 금액으로 거론되고 있다. 허 회장이 차남에게 물려준 ‘알짜 기업’ 일진머티리얼즈에 이어 일진디스플레이까지 잇따라 인수합병(M&A) 시장에 매물로 나오면서 그 배경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소방수’로 불렸던 이는 삼성SDI 출신인 심임수 전 일진디스플레이 대표다. 허 회장은 2015년 회사를 떠난 심 전 대표를 2019년 다시 대표직에 앉혔다. 그는 2009년부터 2015년까지 일진디스플레이를 이끌며 터치스크린패널(TSP) 사업을 핵심 성장동력으로 육성한 인물이다. 2008년 99억원에 불과하던 매출은 2013년 6591억원으로 불었다. 이 공로로 심 전 대표는 그룹 창립 이후 최초로 2014년 ‘부회장’ 직에 올랐다.

그런 그도 2년을 넘기지는 못했다. 실적 개선의 기미가 없어서다. 일진디스플레이는 지난해 매출 1014억원, 영업손실 354억원을 기록했다. 지난해 말 김기환 대표로 다시 선장을 바꾸고는 올초 급한 불을 끄기 위해 217억원 규모 유상증자를 통해 자금을 수혈했다. 올 4월엔 허 회장과 서울대 금속공학과 동문인 이교진 부회장을 각자 대표로 추가 선임했지만 백약이 무효였다. 일진디스플레이가 지난 2일 “최대주주가 지분 매각 등 다양한 전략적 검토를 진행 중”이라고 확인한 배경이다.허 회장은 일찌감치 장남과 차남에게 계열사별로 증여를 끝마쳤다. 일진디스플레이는 허 회장이 대주주로 남아 있는 유일한 회사다. 승계 대신 매각을 택한 것은 일진디스플레이의 성장성이 더는 매력적이지 않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란 분석이다. 2021년 말 기준 일진디스플레이 매출 비중은 LED 사파이어 기판 14%, 터치스크린패널 86%다.

투자은행(IB)업계 관계자는 “허 회장은 성장 잠재력이 클 것으로 예상되는 소재·부품·장비에 앞서 투자하고 10~20년 지나 차츰 결실을 거두는 스타일”이라며 “일진디스플레이 사업 구조로는 밝은 미래를 그리기 힘들 것”이라고 했다. 1940년생인 허 회장이 이번 매각을 끝으로 은퇴 수순을 밟을 것이란 관측도 많다.

허 회장의 차남인 허재명 일진머티리얼즈 대표도 지분 매각을 추진 중이다. 허 대표가 보유 중인 일진머티리얼즈 지분 53.3%가 대상이다. 롯데케미칼과 사모펀드 운용사 베인캐피탈 등 4개사를 적격인수후보군(쇼트리스트)으로 선정한 후 실사가 한창이다. 동박사업 특성상 지속적인 대규모 투자를 통해 해외 공장을 확대해야 하는 부담 때문에 허 대표가 매각을 결정했다는 관측이 많다.두 회사 매각이 마무리되면 일진그룹 외형은 축소가 불가피할 전망이다. 시가총액은 60%, 매출은 20% 이상 현재 대비 줄어들 것으로 예상된다. 일진홀딩스, 일진다이아 등 일진그룹의 지난해 매출은 약 2조3000억원이다.

김병근 기자 bk11@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