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화의 이단아' 故 황창배가 허문 경계…'접변'을 보다

김종영미술관 유작전 '소정 황창배, 접변(接變)' 다음달 25일까지
무제(한지에 혼합재료·1989). 김종영미술관 제공
한지 위에 검은색 아크릴 물감이 온통 칠해져있다. 그 위로 노란색과 갈색 물감으로 태극 무늬가 그려져있고, 어린아이 같은 서툰 글씨체로 '평화', '사랑'이란 글자가 쓰여있다.

다른 작품은 일반 한지보다 좀 더 두꺼운 장지가 배경이다. 아크릴 물감과 과감한 붓 터치로 빠르게 달리고 있는 말을 표현했다. 그 밑에는 '허공에 놀란 말'이라고 적혀있다. 한지라는 한국의 전통적 소재와 아크릴 물감이라는 대표적 서양화 재료의 만남이었다.이들 작품은 '한국화의 이단아', '한국화의 테러리스트'라고 불리는 고(故) 황창배 작가의 유작이다. 지난달 22일부터 서울 평창동 김종영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유작전 '소정 황창배, 접변(接變)'에는 이처럼 동서양의 경계를 넘나드는 작품으로 가득했다.

황창배는 한국화의 새 지평을 연 작가로 평가받는다. 그는 1978년 국전에서 장인어른인 철농 이기우 선생과 합작으로 그린 '세옹마도'로 한국화 최초의 대통령상을 받으며 화려하게 데뷔했다. 이후 밑그림을 생략하고, 한지 위에 서양화 재료를 접목하는 등 과감하고 파격적인 행보를 보였다.
무제(장지에 아크릴릭·1991). 김종영미술관 제공
그는 먹과 벼루 등 전통적 소재로 그림을 그리는 여느 한국화 화가와는 달랐다. 미술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원로 작가의 초대전을 해마다 열어 온 김종영미술관이 올해의 주인공으로 황창배를 선택한 배경이다.황창배에게 한국화와 서양화를 한 작품 안에 담는 작업은 전통의 굴레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한국화의 한계를 넘어서는 과정이었다. 황창배는 생전 인터뷰에서 "전통적 동양화를 공부하다보니 이것 또한 중국적 화법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며 "서양의 방법론을 선택하며 기존 미술에 대한 반발로 모든 것들을 부정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한지 위 아크릴 물감을 사용한 그의 대표 작품들이 그렇게 탄생했다. 이번 전시회의 부제가 '접변'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박춘호 김종영미술관 학예실장은 "문화는 항상 변화하며, 전통은 시간을 초월해 의미를 가져야 한다"며 "그런 점에서 황창배의 작품은 한국 미술의 뿌리를 찾는 작가와 후배들에게 여전히 좋은 본보기"라고 했다.
무제(캔버스에 아크릴릭·1995). 김종영미술관 제공
황창배는 작품에 제목을 달지 않았다. 그는 "제목으로 작품의 다양한 면을 한정하지 않고, 그림으로만 충분히 보여주겠다"고 했다.그는 전통적인 동양화 기법을 뒤집기도 했다. 1980년대 황창배는 말 그림을 통해 즉흥적으로 발묵(먹물이 번져서 퍼지게 하는 것)한 후 형태를 찾아나가는 '숨은그림찾기' 연작을 선보였다. 외곽선을 먼저 그린 후 채색하는 전통적인 '구륵법'을 반대로 적용한 것이다.
무제(화선지에 먹, 채색·1987). 김종영미술관 제공
황창배의 작품세계는 회화에만 그치지 않았다. 그는 철농 이기우 선생에게 서예와 전각을 배우고, 청명 임창순 선생에게 한학과 미술사를 배웠다. 석사 과정을 밟을 땐 전각으로 학위 논문을 쓰기도 했다. 박 학예실장은 "그만큼 황창배가 전통 서화를 남다르게 연구했다는 증거"라고 했다. 전시는 9월 25일까지.
무제(화선지에 수묵담채·1978). 김종영미술관 제공
이선아 기자 sun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