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몸을 내던진 열정의 화가, 터너[김희경의 영화로운 예술]

영화 '미스터 터너'.
폭풍우와 눈보라가 몰아치는 바다. 아슬아슬하고 위험천만해 보입니다. 그런데 이때 배에 타고 있던 한 남자가 몸을 돛대에 기대어 밧줄로 꽁꽁 묶기 시작합니다. 그의 요청을 받고 이를 돕던 선원은 말합니다. "나도 간이 크단 소릴 듣지만, 당신을 따라가려면 한참 멀었소."

마이크 리 감독의 영화 '미스터 터너'(2014) 속 조지프 말로드 윌리엄 터너(1775~1851)의 모습입니다. 영국 출신 화가인 터너는 '영국의 국민화가'로 불릴 정도로 오늘날까지 많은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영국 대표 미술관 '테이트 갤러리'에선 매년 젊은 미술가 중 한 명을 선정해 최고의 미술상 '터너상'을 주고 있죠. 영화에선 '스위니 토드' '해리포터' 등에 나왔던 배우 티모시 스폴이 터너 역을 맡았습니다.
눈보라-항구 어귀에서 멀어진 증기선, 1842, 테이트 브리튼 갤러리
이 장면에서 터너는 대체 무엇을 하려 했던걸까요. 그는 실제 폭풍우와 눈보라가 몰아치던 배에 묶여 있었다고 합니다. 무려 4시간 동안이나 말이죠. 이해가 잘 되지 않을 정도로 무모하게 느껴지는데요.

그럼에도 터너가 이런 일까지 한 것엔 나름의 이유가 있습니다. 그는 단순히 눈앞에서 펼쳐지는 광경을 그리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보는 것이 전부가 아니며, 몸소 체험하고 느끼는 바를 화폭에 담아야 한다고 생각했죠. 사실적 묘사에 그치지 않고, 자신의 순간의 감정을 포착하고 고스란히 표현하려는 '낭만주의'에 해당합니다.

그렇게 그가 온몸을 던져 가며 완성한 작품은 '눈보라-항구 어귀에서 멀어진 증기선'입니다. 배도, 폭풍우나 눈보라도 형체를 정확히 그리진 않았습니다. 대신 거친 붓질로 거대한 소용돌이가 치는 것처럼 표현했죠.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그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기분이 듭니다. 또 자연의 엄청난 힘 앞에서 인간은 얼마나 작고 나약한 존재인가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옴짝달싹도 못한 채 폭풍우와 눈보라를 고스란히 맞으며 터너가 느꼈던 감정은 아마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요.
조지프 말로드 윌리엄 터너
터너는 가난한 이발사 아버지와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럼에도 뛰어난 재능을 보여 일찌감치 영국 화단을 평정했습니다. 많은 부와 명예도 누렸죠. 하지만 그는 결코 안주하지 않았습니다.

터너는 화가들 중 손에 꼽을 만큼 열정적이고 역동적인 인물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그는 주로 풍경화를 그렸는데, 가만히 한자리에 머무르며 그림을 그리지 않았습니다. 위험한 상황에도 주저하지 않고 과감히 도전했습니다. 화산이 폭발하는 모습을 관찰하기 위해 화산 가까이에 갔을 정도죠. 그는 풍경화 하나에도 역사와 사회 등 다양한 이슈를 담아내려 했습니다. 그림 밖의 현상들을 적나라하게 그리기 보다, 그림 안에 의미를 내포하는 식이었죠. 터너의 대표작 중 하나인 '노예선'엔 심각한 사회 문제와 끔찍한 현실이 담겨 있습니다.
노예선, 1840, 보스턴미술관
당시 영국엔 노예를 사고파는 상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림은 이들이 아프리카에서 원주민들을 잡아다 노예로 팔려고 배로 이동하는 모습을 그린 겁니다. 그런데 이 배는 폭풍우를 만나 힘겨운 사투를 벌여야 했습니다. 이런 극한의 상황이 닥치자 거의 아무것도 먹지 못했던 노예들은 쓰러지기 시작했죠.

그러자 선장은 노예들을 바다에 내던지라고 명령했습니다. 이 배는 보험에 가입돼 있었는데요. 약정에 따르면 노예들이 자연사를 하면 보상을 받을 수 없지만 실종이 되면 보상을 받을 수 있었던거죠. 작품에 핏빛 선홍색 등이 뒤섞여 있는 건 이 잔인한 명령으로 인해 수많은 노예들이 죽음을 맞이한 순간을 표현한 겁니다. 터너는 기차도 자주 그렸는데요. 이 기차에도 당시 사회의 분위기를 반영했습니다. '비와 증기와 속도'라는 작품엔 빠르게 달려오는 기차의 속도감이 생생하게 느껴집니다. 터너가 기차에 대해 호기심을 가지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죠.

하지만 왠지 모를 불안도 느껴집니다. 전체적인 색감이 어둡고 기차에서 뿜어져 나오는 뿌연 연기가 주변을 뒤덮고 있죠. 급속히 진행되는 산업화가 어떤 미래를 가져올지 내심 불안해하는 분위기를 담은 겁니다.
비와 증기와 속도, 1843~1844, 런던 내셔널갤러리
영화엔 터너가 사진관을 찾아가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는 사진사에게 막 보급되기 시작한 카메라 옵스큐라에 대한 질문을 던지며 관심을 갖죠. 그러나 이 카메라로 증명 사진을 찍으며 씁쓸하고 불안한 표정을 짓습니다.

10초만에 사진을 찍어내며 "다 끝났다"라고 말하는 사진사를 보며 "나까지 끝장난 기분이군"이라고 혼잣말도 합니다. 그의 불안처럼 오늘날 사진은 터너가 직접 온몸을 던져 가며 담았던 순간들을 훨씬 쉽고 간편하게 포착하고 있습니다.
영화 '미스터 터너'.
하지만 터너의 그림이 주는 감동은 오늘날까지도 유효합니다. 스스로를 불태우며 자신이 직접 체험하고 느낀 바를 고스란히 표현하고, 세상의 이면까지도 담아내려했던 터너. 이토록 뜨거운 열정이 들어간 작품만큼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것이 있을까요. 아무리 인공지능(AI) 등 첨단기술이 발전해도, 사람의 영혼이 깃든 예술이 영원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아닐까 싶습니다.

김희경 기자 hkkim@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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