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칩4 참여는 불가피한 선택…日·대만 공식 선언 때까지 기다려라" [박신영의 반도체 패권전쟁]

한경 DEEP INSIGHT

中 빅펀드 조성 등 반도체 육성에 돈 쏟아부어
2019년 세계 반도체 생산 점유율 美 추월하자
위협느낀 미국, 日·대만·韓 공급망 동맹 구상

칩4 참여로 기운 한국…"맨 마지막에 가입해야
中에 어쩔 수 없이 가입한단 이미지 줄 수 있어"
美·日에 반도체장비 안정적 공급 확약도 받아야
8월은 한국 반도체산업의 운명을 가르는 분기점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미국 정부가 한국 정부에 ‘칩(chip)4 동맹’ 참여 여부를 결정할 것을 요구하고 있어서다. 칩4는 미국 한국 대만 일본 등으로 구성된 반도체 공급망 협의체를 뜻한다. 한국 정부는 섣불리 결정을 못 하고 있다. 칩4엔 중국의 반도체 굴기를 견제하려는 미국의 강력한 ‘경제 안보 동맹’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중국이 반도체 기술과 공급망 장악을 위해 천문학적인 규모의 돈을 쏟아부으면서 이에 위협을 느낀 미국이 내놓은 방안이 칩4다. 반도체 기술을 보유한 주요국을 미국 주도의 기술 동맹 테두리 안에 두려는 전략이다.
일러스트=추덕영/신택수 기자
전문가들은 한국이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미국과의 안보 동맹도 중요하지만 중국이 한국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워낙 크기 때문이다. 중국이 반도체 수입을 줄이면 한국 반도체 기업은 타격받을 수밖에 없다. 이렇다 보니 칩4 가입에 앞서 미·중 사이에서 누구와도 불편한 관계를 형성하지 않도록 복잡한 ‘고차방정식’을 풀어야 한다.업계에서는 한국이 미·중 사이에서 주도권을 쥐기 위해선 반도체 기술력과 생산 역량을 키워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반도체산업 육성이 나라 경제뿐 아니라 외교·안보 차원에서도 목소리를 높일 수 있는 힘이기 때문이다.

美 위협할 수준으로 성장한 中 반도체산업

미국의 칩4 구상 시작점은 202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전년도 반도체 생산 점유율에서 중국이 미국을 처음으로 추월한 수치가 나왔다. 시장조사기관 IC인사이츠는 2019년 중국의 반도체 생산 점유율이 13.9%로 미국(12.8%)을 앞섰다고 발표했다.
일러스트=추덕영/신택수 기자
세계반도체통계기구(WSTS)에 따르면 중국의 반도체 시장은 2010년 570억달러(약 74조2700억원)에서 2020년 1434억달러(약 186조8500억원)로 급성장했다. 10년 새 2.5배로 불어났다. 특히 2016년 이후에는 연평균 12%씩 커졌다. 같은 기간 글로벌 반도체 전체 연평균 성장률(6%)을 두 배나 웃도는 수준이다.
중국의 반도체 시장이 이처럼 성장할 수 있었던 데는 중국 정부의 강력한 의지가 작용했다. ‘중국제조 2025’가 대표적이다. 중국제조 2025는 2015년 중국 정부가 발표한 제조업 고도화 전략이다. 반도체 자급률을 2020년 40%, 2025년 70%로 끌어올리는 게 핵심 목표다.

중국 정부는 이 목표를 위해 다양한 방법을 동원했다. 우선 2019년 기술·벤처기업 전용 증시인 커촹반을 개설했다. 커촹반에는 중국 최대 파운드리(반도체 수탁생산) 기업 SMIC를 비롯해 인공지능(AI) 반도체 업체 캠브리콘테크놀로지, 리튬배터리 1위 기업 톈넝배터리 등 197개 기업이 상장돼 있다. 중국 반도체 기업들의 중요한 자금 조달 창구 역할을 했다.앞서 2014년엔 반도체 스타트업과 연구개발(R&D)에 투자할 1387억위안(약 26조원) 규모의 ‘빅펀드’를 조성했다. 중국 재정부, 중국개발은행 등 정부 기관과 중국 국가옌차오(中國烟草), 차이나모바일 등 국유 기업들이 자금을 댔다. 중국 정부는 2019년 7월 2000억위안(약 37조원)을 추가 투입해 2차 빅펀드도 설정했다.

중국 반도체산업의 성장 속도가 예상보다 빠르자 미국 정부와 반도체업계는 충격에 빠졌다. 특히 2020년부터 반도체 쇼티지(수급 부족) 사태가 본격화하면서 반도체 생산라인이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 지역에 집중돼 있다는 점에 심각한 문제의식을 느꼈다. 퀄컴, 엔비디아 등 미국 반도체 기업도 주요 생산은 해외 파운드리에 맡겨두고 있었다. 차량용 칩 공급 부족으로 제너럴모터스(GM), 포드 등 미국 완성차 업체들이 생산에 차질을 빚어도 미국 내에 반도체 공장이 없다 보니 해결할 방법이 없었다. 반도체는 미사일, 로켓과 같은 방위산업 등에도 쓰이는데 미국 기업이 위탁 생산을 위해 안보와 직결되는 민감한 반도체 설계도를 중국에 맡겨야 하는 상황이 생길 수 있다는 지적이 이어졌다.

미, 중국 반도체 견제 본격화

미국은 곧바로 견제에 들어갔다.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는 세계 최대 반도체 장비 업체인 어플라이드머티리얼즈, 램리서치 등 미국 기업이 SMIC 등 중국 반도체 기업에 장비를 판매하는 걸 금지했다. 이 때문에 중국은 미세공정 기술을 도입하지 못하고 있다. 미세공정에 필요한 필수 장비 수입이 가로막혀서다.반도체 회로 선폭 10㎚(나노미터·1㎚는 10억분의 1m) 이하 수준에서 7㎚, 5㎚ 최첨단 반도체를 효율적으로 생산하기 위해서는 극자외선(EUV) 장비가 필요하다. EUV는 파장이 짧은 극자외선을 광원으로 활용해 웨이퍼에 반도체 회로를 새기는 노광 기술이다. 전 세계에서 EUV를 생산할 수 있는 곳은 네덜란드 회사인 ASML이 유일하다. 미국은 네덜란드 정부를 압박해 ASML이 중국에 EUV 장비를 수출하는 걸 보류하도록 한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중국 기업이 생산하고 있는 반도체는 비교적 저사양인 PC용 메모리 반도체와 아날로그 칩 등이 대부분인 것으로 전해졌다.

네덜란드 정부와 ASML을 통한 미국의 중국 반도체산업 압박은 최근까지 이어지고 있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미국은 ASML에 EUV뿐 아니라 심자외선(DUV) 노광장비도 중국에 판매하지 못하게 제지하고 있다. DUV 노광장비는 불화아르곤(ArF)을 광원으로 사용하는데 EUV보다 한 세대 뒤진 것이지만 자동차 스마트폰 PC 등에 탑재되는 반도체를 생산할 때 가장 많이 활용한다.

중국의 반도체산업은 미국의 견제로 직격탄을 맞았다. 중국 베이징대 국제전략연구소는 올초 발표한 보고서에서 “중·미 간 과학기술 디커플링 이후 양국이 모두 타격을 입었지만, 중국의 대가가 더 컸다”며 “중국의 정보기술(IT) 산업이 한계에 빠졌다”고 분석했다. 보고서는 “미국의 과학기술 디커플링 전략이 중국의 선진 기술 확보와 인재 유치 어려움을 가중시키고 있다”고 진단했다. 또 “중국은 디커플링 이후 기술이나 산업 등 대부분 분야에서 현저하게 (발전이) 뒤처질 뿐 아니라 기술 ‘진공상태’에 빠졌다”며 “특히 반도체 제조와 AI 분야에서 큰 대가를 치르고 있다”고 전했다.

미국 정부는 이달 초 YMTC 등 중국에서 낸드플래시를 생산하는 기업에 미국산 반도체 장비 수출을 제한하는 방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YMTC가 올해 안에 200단 수준의 낸드플래시를 양산할 것이라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이에 대한 견제에 들어간 것이다. 이 규제안이 시행되면 중국에 낸드플래시 공장이 있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도 타격받을 수 있다. 미국은 중국의 파운드리(반도체 수탁생산)산업 발전을 막는 방안도 추진하고 있다. 지난달 미 상무부는 자국 반도체 장비업체에 14㎚ 이하 미세공정에 필요한 장비를 중국에 수출하지 말라는 내용의 공문을 보냈다.

칩4, 中 고립 추진

미국은 중국으로의 반도체 장비 반입을 제한한 데 이어 세계 반도체 생태계에서 중국을 고립시키는 방안도 추진 중이다. 칩4가 대표적이다. 일본과 대만은 이미 칩4 가입 의사를 미국에 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 정부는 공식적인 답변을 미루고 있다.

칩4에 가입하면 구체적으로 어떤 경제 보복이 있을지 아직 알 수 없다. 하지만 가입 자체만으로 중국과의 사이에 긴장감이 높아질 수밖에 없다. 한국 정부로선 피하고 싶은 상황이다. 한국의 반도체 수출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하기 때문이다.

산업통상자원부가 최근 발표한 수출입동향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한국의 대중국 반도체 수출액은 269억5000만달러(약 35조900억원)로 가장 많다. 이외 아시아 지역이 142억8000만달러(약 18조6000억원), 미국은 44억1000만달러(약 5조7400억원)였다. 유럽연합(EU)은 11억9000만달러(약 1조5500억원)에 불과했다. 한국 정부가 칩4 가입 여부를 공식적으로 발표하지 못한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 들어 가입 쪽으로 무게추가 기우는 분위기가 감지된다. 한덕수 국무총리는 지난달 28일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칩4 가입과 관련해 “(한국) 반도체가 세계의 유수”라며 “그런 데(칩4) 들어가면 우리가 정보를 얻을 수 있고 룰(규칙)이 생기게 되면 우리의 필요성에 따라 룰을 만들 수도 있다. 또 우리와 다른 나라 간 협력을 강화할 수 있는 등 긍정적인 차원의 것을 많이 보는 게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박진 외교부 장관도 지난달 27일 서울 태평로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서울외신기자클럽(SFCC) 초청 간담회에서 “어느 특정 국가를 배제하기 위한 게 아니라 국익이라는 차원에서 판단할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7일 정부는 이르면 이달 말 열릴 칩4 예비회의에 참석할 방침을 밝혔다.

중국은 견제 의사를 내비치고 있다. 자오리젠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최근 정례 브리핑에서 “한국은 중·한 관계 발전에 유리하고 세계 산업망과 공급망 안정에 유리한 일을 많이 하기를 바란다”고 했다. 9일 열린 한·중 외교부 장관 회담에서도 이 문제가 거론된 것으로 알려졌다. 박 장관은 칩4가 중국을 반도체 공급망에서 배제하거나 고립시키는 목적이 아니라는 점을 적극 설명한 것으로 전해졌다.

대만 앞세워 칩4 가입해야

전문가들은 칩4 가입을 피할 수 없는 만큼 중국 정부와의 관계 악화를 막는 방법을 찾는 데 집중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중국에 한국 정부의 불가피한 상황을 잘 설득시켜야 한다는 얘기다. 박재근 한양대 융합전자공학부 교수(한국반도체디스플레이기술학회장)는 “대만과 일본 등 나머지 국가 정부가 칩4 가입을 공식 선언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며 “한국이 맨 마지막에 가입 의사를 밝혀야 중국 정부에 ‘할 수 없이 가입한다’는 이미지를 줄 수 있다”고 말했다. 또한 칩4가 ‘가치 동맹’이 아니라 반도체를 주로 생산하고 개발하는 국가들이 대화하기 위한 협력체라는 점도 강조할 것을 주문했다.

칩4 가입 시 미국과 일본으로부터 반도체 장비 및 소재의 안정적인 공급을 확약받아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이를 통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중국 내 생산라인 증설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점을 중국 측에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국민의힘 반도체산업 경쟁력 강화 특별위원장인 양향자 의원은 “제일 중요한 것은 한국 반도체 기업의 기술력”이라고 말했다. 기술력이 확실하면 칩4에서도 주도권을 갖고 어젠다를 끌고 갈 수 있다는 설명이다.

미국은 반도체 생태계 내 주도권 확보를 위해 한국 반도체 기업의 자국 투자를 적극 유치하고 있다. 최근에는 반도체산업 육성 법안을 통과시켰다. 미국의 반도체산업 발전과 기술적 우위 유지를 위해 모두 2800억달러(약 365조4000억원)를 투자하는 게 핵심이다. 미국의 인텔뿐 아니라 대만 TSMC, 삼성전자 등 미국 내 생산라인이 있는 반도체 기업은 모두 혜택을 받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미 삼성전자는 170억달러(약 22조1900억원)를 들여 미국 텍사스주에 파운드리 증설을 추진하고 있다. 텍사스주에 20년에 걸쳐 약 250조원을 투자해 반도체 공장 11곳(오스틴 2곳·테일러 9곳)을 신설하는 중장기 계획도 밝혔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최근 조 바이든 대통령과 만나 미국에 220억달러(약 29조원)를 신규 투자하기로 했다. 150억달러(약 20조원)를 첨단 패키징 제조시설 건설, 미국 대학과의 반도체 연구개발(R&D) 협력 등에 쓸 예정이다.

한국 정부도 서둘러 지원 법안을 마련했다. 반도체 중심의 공급망 안정화와 첨단산업 육성을 위한 ‘국가첨단전략산업 경쟁력 강화 및 보호에 관한 특별조치법(국가첨단전략산업법)’이 4일부터 시행에 들어갔다. 일명 반도체 특별법이다. 반도체산업은 국가로부터 시설 투자와 세제 지원 등을 받게 된다. 업계 관계자는 “미국뿐 아니라 일본과 대만 EU 등이 경쟁적으로 반도체산업 지원안을 내놓고 있다”며 “반도체는 시설·장비 투자가 핵심 경쟁력을 좌우하는 만큼 정부의 지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말했다.

박신영 산업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