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현실 칼럼] 尹 정부의 칩4 딜레마, 원칙이 해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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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美經中→安美經世, 너무 당연윤석열 대통령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정상회의 참석에 맞춘 최상목 경제수석의 탈(脫)중국 브리핑 장면은 즉각 ‘안미경중(安美經中·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 탈피 선언으로 받아들여졌다. “정부가 공개적으로 할 말, 안 할 말 구분도 못하나”라고 생각한 기업인이 적지 않았다. 이창양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이 “산업정책은 색깔이 없다”고 진화에 나섰지만, 최 수석 발언의 여진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한국은 자유무역주의로 가면 돼
반도체 미래 칩4 가입, 주권 사안
美와 첨단기술 협력 확대 기회
中 우려엔 외교력으로 풀어야
무역 보복 땐 '강한 상호주의'로
안현실 AI경제연구소장·논설위원
인도·태평양 경제 프레임워크(IPEF) 가입도 그렇다. 어느 국가가 주도하든 무역 확장에 도움이 된다면 다자간 협정에 가입하는 게 한국 국익에 부합한다. 특정국 배제에 찬성할 이유가 없고, 무역 다변화를 추구해온 게 한국이다. 자유무역을 지향하는 한국은 이게 원칙이다. 이 원칙에 비춰볼 때 IPEF 가입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IPEF를 놓고 대통령실에서 ‘안미경중’에서 ‘안미경세(安美經世·안보는 미국, 경제는 세계)’로 간다는 설명을 굳이 내놓으며 중국을 자극할 필요가 있었는지 의문이다. 한국은 처음부터 안미경세였다.애써 의미 부여를 안 해도 될 사안까지 안미경중 탈피라고 하다 보니 윤 정부가 원칙을 갖고 결정하면 끝날 문제 앞에선 머뭇거리는 형국이 되고 말았다. 미국 국무부가 제안한 반도체 협의체 ‘칩4(한국·미국·일본·대만)’ 가입 여부가 그렇다. 미국도 부처 간 경쟁이 없을 리 없다. 안보·경제 연계로 국무부와 상무부의 관계가 그렇다. 미국 행정부 내 역학이 어떠하든 두 부처 모두 중요한 한국으로선 답을 주지 않을 수 없다. 한국이 시간을 끄는 사이 중국은 중국대로 칩4는 중국 견제라고 목소리를 높이는 상황이 됐다. 정부는 중국을 자극하지 않을 의제와 방식을 조율한다며 미국과 예비회의를 갖는다고 했다. 미국이 주도하는 칩4에 주제넘게 나서 긁어 부스럼 만드는 건 아닌지 걱정스럽다.
중국이 칩4를 어떻게 보느냐를 제쳐두면 사안이 복잡하지 않다. 칩4 협의 주제는 반도체 산업정책 리뷰, 인력양성 및 교환, 차세대 반도체 협력, 공급망 안정화 정보 공유 등이다. 워킹그룹을 구성해 민·관이 실무적으로 논의해 보자는 것이다. 어디에도 중국을 타깃으로 한다거나 대중국 수출 통제를 말하는 대목은 없다. 아젠다와 방식에서 한국이 참여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대만 참여로 문제가 꼬였다는 주장도 있지만, 파운드리 협력 니즈를 가진 미국으로선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중국이 대만 참여를 반대한다면 칩4를 주도하는 미국이나 가입하는 대만에 따질 일이다. 칩4라지만 한국으로선 파운드리 경쟁 관계인 대만이나 한국에 반도체 수출규제를 하고 있는 일본이 아니라 미국과의 양자 협력이 핵심일 것이다. 한·미 협력은 한·중 협력과 마찬가지로 한국 산업전략의 주권적 옵션에 해당한다.“가입해도 당장의 실익이 없다” “중국의 무역보복이 걱정된다”는 주장도 있다. 반도체의 미래까지 고려한 기회비용으로 보면 눈앞의 실익만 계산할 때가 아니다. 정부는 산업정책의 외연을 넓힐 수 있고, 기업은 미래 시장을 창출할 수 있다. 한국이 칩4 단순 참여를 넘어 산업·기술적으로 꼭 협력할 전략 국가란 점을 미국에 각인시킬, 다시 말해 반도체와 이에 기반한 인공지능(AI)·가상현실 등에서 미국과 협력·분업의 큰 그림을 보여줄 좋은 기회다. 오히려 걱정되는 건 윤 정부가 대만 일본을 능가할 이런 비전을 만들어낼 수 있느냐는 것이다.
중국의 무역보복 걱정에 언제까지 갇혀 있을 수 없다. 비슷한 사안이 앞으로 수없이 생길 텐데 그때마다 주저하면 한국이 할 수 있는 게 없다. 한국이 글로벌 무역 국가라면, 모든 국가와 호혜적 협력을 하되 부당한 무역보복엔 응징으로 맞서는 ‘강한 상호주의’ 원칙을 구사할 수 있어야 한다. 정부는 한·중 외교장관 회담에서 칩4 예비회의 참석이 아니라 반도체 미래를 논의할 국가 간 협력 차원에서의 칩4 가입을 중국에 바로 통보해야 했다. 덧붙여 특정국 배제와 수출규제에 반대한다는 한국의 확고한 원칙을 중국에 설명하면 되는 것이다. 한·중 수교 30년이다. 물밑에서 중국과 이 정도의 신뢰 공간도 만들지 못하는 무능한 외교부라면 문을 닫아야 한다. 강대국 사이에 끼인 국가일수록 원칙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미국에도 중국에도 우스운 국가가 되는 건 한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