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워서, 어려워서 이름난 홀…바람 못 읽으면 프로도 '더블 보기'

대한민국 '시그니처 홀'
(8) 제주 핀크스GC 18번홀(파4)

물·잔디·햇빛이 만든 그림같은 홀
화이트티 322m·레이디티 288m
짧지만 더블·트리플보기 쏟아져
프로도 4.28타 친 '핸디캡 1번홀'

SK가 되살린 '세계 톱100 코스'
얼굴이 따가울 정도의 강풍
조희찬 기자가 제주 서귀포시 핀크스GC 시그니처홀 18번홀(파4)에서 티샷하고 있다. 이 홀은 강한 바람과 그린 앞 해저드 등 ‘함정’ 때문에 수많은 프로가 더블보기를 할 정도로 어려운 홀이다.
특정 골프장의 ‘시그니처홀’이 골퍼들 입에 오르내리는 건 둘 중 하나다. 눈부시게 아름답거나, 이가 갈릴 정도로 어렵거나. 제주 서귀포시에 있는 핀크스GC의 시그니처홀인 18번홀(파4) 티잉 에어리어에 섰을 때 든 생각은 ‘이런 풍광 덕분에 유명해졌구나’였다. 오른쪽 그린 앞을 차지한 웅덩이와 그 안에 담긴 제주 하늘은 초록빛 페어웨이를 조명처럼 비추는 햇빛과 한데 어우러져 한폭의 그림이 됐다.

티샷도 그림처럼 날아갔다. 화이트 티(전장 322m)에서 적당한 탄도로 출발한 공은 210m 정도 날아가 페어웨이에 떨어졌다. 남은 거리는 110m. 제일 자신 있는 피칭웨지로 홀에 붙일 수 있는 거리다. 마음이 편해지자 17홀을 도는 동안 보이지 않던 제주 오름들이 눈에 들어왔다. 긴장이 확 풀린 걸 김동현 핀크스GC 이사가 귀신같이 알아봤다. “티샷을 잘 쳤다고 안심했다간 망하는 홀입니다. 이제부터가 진짜예요. 바람을 제대로 읽지 못하면 그대로 더블보기, 트리플보기로 갑니다.”

‘도시락 왕’의 염원, SK가 완성

핀크스GC를 만든 사람은 ‘도시락 왕’으로 불리던 재일동포 김홍주 씨다. 한때 가맹점이 3000여 개에 달했던 일본 도시락업체 ‘혼케 가마도야’를 일궈낸 김씨가 사재를 털어 1999년 개장했다. 김씨는 골프장을 만들면서 아름다운 제주의 자연을 살리고 싶었다. 세계적인 골프장 설계가 테오도르 로빈슨에게 맡기면서 주문한 것도 “최대한 있는 그대로 그려달라”였다. 핀크스라는 이름을 ‘그리다’는 뜻의 라틴어 ‘pinxit’에서 따온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덕분에 핀크스GC는 2005년 한국 골프장 중 최초로 ‘톱100 골프코스’가 선정한 ‘세계 100대 골프 코스’에 들었다. 세계 각지에 있는 골프업계 전문가들이 순위를 매기는 ‘톱100 골프코스’는 세계 골프업계에서 권위를 인정받고 있다. 하지만 2000년대 후반 제주도 곳곳에 골프장이 생기면서 핀크스GC는 경영난에 빠지게 됐다. 자금난은 잔디 관리 부실로 이어졌고, 다시 회원 이탈을 불렀다. 악순환의 고리를 깨는 건 주머니 사정이 넉넉한 새 주인을 맞는 방법뿐이었다.

이때 구원투수로 등장한 게 SK그룹이다. 2010년 골프장을 인수한 SK는 핀크스GC를 다시 국내 최고 수준의 명문 골프장으로 재탄생시켰다. 잡초가 무성했던 잔디부터 싹 드러냈다. 그리곤 페어웨이에는 벤트그라스, 러프에는 켄터키블루그라스를 새로 깔았다. 클럽하우스도 대대적으로 리노베이션했다. ‘아름다운 풍광만 골퍼들의 눈에 담겠다’며 골프장 인근에 있던 송전탑 3개를 SK 비용으로 땅에 묻었다. 여기에만 100억원을 썼다.김 총지배인은 “SK그룹의 명성에 걸맞게 골프장을 처음부터 다시 짓는다는 생각으로 개보수 작업을 했다”며 “그렇게 8년 정도 정성을 쏟자 모두가 인정하는 명문 코스가 됐다”고 말했다. 핀크스GC는 한국프로골프(KPGA)코리안투어 SK텔레콤 오픈과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투어 SK네트웍스 레이디스클래식 등을 여는 등 대회 코스로 명성을 쌓아가고 있다.

“두 클럽 짧거나 길게 쳐야”

18번홀은 블랙티 365m, 블루티 347m, 화이트티 322m, 레이디티 288m로 짧은 파4에 속한다. 하지만 지난해 KLPGA투어 선수들의 18번홀 평균타수는 4.28타에 달했다. 대회 나흘 동안 가장 많이 타수를 잃은 곳이었다. 22개의 더블보기와 트리플보기가 쏟아졌다. 대부분 공을 그린 앞 웅덩이에 빠뜨려 타수를 잃었다. 김 총지배인은 “수많은 선수가 티샷을 잘 치고도 세컨드샷 실수로 더블보기를 적어냈다”고 말했다.

세컨드 샷 지점에 가자 왜 프로선수들이 이 지점에서 고전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린 앞에는 3m만 짧게 쳐도 빠지는 해저드와 낭떠러지가 있다. 짧으면 해저드에 빠지고, 길면 가파른 내리막 경사 퍼트를 각오해야 한다. 김 총지배인은 “경사가 가파른 탓에 내리막 퍼트를 하다가 공이 해저드까지 구르는 경우도 많다”며 “상당수 프로 선수는 맞바람을 우습게 여기다가 샷이 짧아 해저드에 공을 빠뜨린다”고 했다.하필이면 강하게 부는 바람이 얼굴을 정면으로 때렸다. ‘맞바람’이었다. 17번홀까지 이 정도 거리에서 피칭 웨지를 건네던 캐디가 8번 아이언을 손에 쥐여주며 말했다. “100%의 힘으로 풀스윙하세요.”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있는 힘껏 휘둘렀는데 ‘핀 하이’로 날아간 공이 깃대 왼쪽에 섰다. 그리고 투 퍼트.

프로 선수들이 평균 4.28타를 적어낸 홀에서 파를 기록했다. 캐디는 “이 홀은 바람 때문에 최대 두 클럽까지 길거나 짧게 쳐야 한다”며 “제 말을 믿지 않고 평소 거리로 친 사람들의 공은 물속에서 잠자고 있다”고 했다. 그는 “그래서 회원들이 그린 앞 해저드에 ‘골프공 무덤’이란 별명을 붙여줬다”며 웃었다.

27홀짜리 골프장은 핀크스GC의 회원 수가 300여 명뿐이다. 하루 받는 팀 수가 많아야 70팀이라 그리 붐비지 않는다. 티 타임 간격은 10분으로 넉넉한 편이다.

서귀포=조희찬 기자 etwood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