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극 작가' 데뷔한 AI,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까 [선한결의 IT포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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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카오브레인 AI 시극 '파포스' 보니영화, 드라마, 음악, 시… 문화예술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때 그 의미를 더합니다. 관객이나 청자가 작품이 묘사한 내용과 꼭 같은 경험을 했거나, 작품 속 가치관에 완전히 동의하는 것이 아니라도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감동을 주는 일은 인간만의 영역일까요. 최근 서울 대학로 연극 무대에 오른 인공지능(AI) 시극을 통해 알아봤습니다.
공감과 이해 어려운 시구…사람과의 협업도 별 효과 못내
"AI에 데이터만 더 학습시키면 '공감' 끌어낼 수 있다" 전망도
AI 시극 '파포스'는 카카오의 AI 전문기업 카카오브레인과 미디어아트그룹 슬릿스코프가 개발한 ‘시 쓰는 AI’ 시아의 시를 바탕으로 짠 연극입니다. 지난 12일부터 14일까지 서울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 무대에 오릅니다.이 AI는 카카오브레인의 초거대 AI 언어모델 KoGPT를 활용해 만들었습니다. 인터넷 백과사전, 뉴스 등으로 한국어를 익혔다고 합니다. 시는 약 1만여편을 학습했다고 하네요.
시 내용은 지난 8일 시집을 통해 공개됐습니다. 시 자체는 단순히 AI가 한 단어 뒤에 올법한 다른 단어를 짧은 문장 형식으로 열거해놓은 수준입니다.
텍스트의 내용을 알면서도 공연장에 간 것은 AI를 쓰는 예술에서 사람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지가 궁금했기 때문입니다. AI는 단조로운 결과물을 ‘출력’했습니다. 이를 무대에서 말하고, 연기하며 재현하는 사람들의 숨이 어떤 새로운 효과를 불어넣을 수 있을지 알고 싶었습니다. 공연은 어느 회사·단체 등의 지원을 받지 않고 제 돈을 내고 관람했습니다.
무대에 오른 인간과 AI, ‘협업’ 결과는
결과는 ‘딱히 별 효과는 없었다’였습니다. 파포스는 배우 다섯명이 카카오AI가 쓴 시를 번갈아 가며 읽는 구성입니다. 감정을 표현하도록 목소리의 높낮이와 말의 속도 등을 다양하게 짰습니다.여기에다 인간의 몸짓이 더해집니다. AI 시에 ‘뒤집을수록’이라는 구절이 나올 때 이를 읽는 배우가 몸을 뒤집는 식입니다. 일부는 말장난도 더했습니다. ‘도래할 것이다’라는 구절을 읊을 때 도레미 음률을 실어 ‘도-레↗ 할 것이다’처럼 표현한 게 그런 예입니다.
하지만 사람의 목소리, 몸짓, 표정 모두 공연의 의미를 키우기엔 역부족이었습니다. 텍스트 자체의 한계가 큽니다. 카카오 AI는 시의 모티브로 삶과 죽음, 슈뢰딩거의 고양이, 유한소수, 우주 등 ‘있어 보이는’ 주제를 주로 다뤘습니다. 이중 시극에 등장한 몇줄을 소개하자면 이렇습니다.
<슈뢰딩거 고양이가 들어있다. 슈뢰딩거 고양이는 동시에 죽어있고 동시에 살아있다. 그래서 고양이는 난해한 텍스트다. 에~취, 글 읽을 때는 고양이가 없어야 한다.>
이는 참 영리한 선택일 수도 있겠습니다. 주제들이 각각 누구도 결론을 알 수 없고, 광범위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들이라 무슨 단어든 붙여놓으면 일단 의미가 있겠거니 여길 수 있으니까요.AI가 단순 확률에 따라 도출했지만, 딱히 맥락엔 맞지 않는 말이 이어져도 ‘시는 원래 그런 것이다’라고 해버릴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렇다 보니 인간이 썼다면 ‘아무말대잔치’ 취급받았을 글도 AI가 쓰면 시가 되는구나 싶은 장면이 많았습니다.
<사이에 있는 것은 나뭇잎 하나. 젖은 나뭇잎, 마른 나뭇잎. 사이. 나무와 불과 연기. 사이. 사이에 있는 것은 뜨겁다.>
<착각, 한다. 착각 속으로 들어간다. 진실이 착각착각 속으로 들어간다. 들어간다.>
이런 시구를 들으며 장면이 여섯번쯤 바뀌자 조금 괴로워졌습니다. 무대와의 동감, 공감, 이해 모두가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동음이의어 등을 활용해 중간중간 들어간 말 놀이와 번쩍거리는 미디어아트 등도 무대와 객석간 감정의 이격을 더 키울 뿐이었습니다.
배우 두 명이 마치 언쟁하듯 시를 나눠 읊는 장면에서는 ‘내가 이 대화를 독일어나 스와힐리어로 듣고 있어도 지금과 아무런 차이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외국어 대화를 한 시간 넘게 꼼짝하지 못한 채 듣고 있는 기분이었으니까요.
'공연장에 오지 않았다면 이 시간에 집안 청소라도 하고 있을텐데, 나는 대체 호기심이라는 이유로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자원을 낭비해왔고 앞으로 또 낭비할 것인가.' 자아 성찰의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왔습니다. 시극을 쓴 AI 시아 식으로 표현하자면 이럴 것 같습니다. <나는 이 예술-비예술을 나의 부재로써 완성하고 싶었습니다. 다리, 문. 다리, 문.> 그냥 중간에 나가고 싶었다는 얘기입니다.극 중후반부쯤이었을까요. 무대 전체가 밝아진 짧은 순간에 대각선에 앉아있던 다른 관객과 눈이 마주쳤습니다. 지루한 표정으로 팔짱을 낀 채 몸을 비틀고 있는 분이었습니다. 딴생각을 하면서 무대에서 고개를 돌린 저와 비슷한 기분을 느끼신 듯했습니다. 순간 그 관객과 저 둘다 피식 웃음을 지었습니다. 공연장에 입장한 지 한 시간여 만에 처음으로 느낀 공감과 이해의 순간이었습니다.
그래도 의미는 있습니다
AI 시극에 대해 ‘공감을 주지 못했으니 좋지 않은 공연’이라고 하는 것은 좀 불공평한 일일 것 같습니다. 애초에 관객에게 감정적 동요를 일으키려는 게 목적이 아니었을 공산이 크기 때문입니다.AI 기술이 각 분야에서 범람하는 시대에 예술분야에서 인간의 영역이 얼마만큼인지를 알아보는 것만 해도 의미가 있습니다. 이날 객석에서 만난 한 문화단체 관계자도 “극의 구성엔 일부 아쉬운 점이 있지만, 예술이 AI를 만났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알아보는 시도 자체가 중요한 일”이라고 평가했습니다.
카카오브레인의 AI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단은 AI 기술을 고도화해 일상생활에서 편의를 제공하는 게 주요 목표입니다. 부차적으로 AI를 통한 시 프로젝트 등을 펼치는 것도 보다 인간다운 AI를 만들어 사람의 삶을 더 낫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앞으로 AI가 사람의 마음을 울리는 시까지 쓸 수 있을까요. 그리 어렵지 않을 수도 있겠습니다. 한 개발자는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느끼는 것을 다룬다면 공감을 얻기가 쉬울 텐데, AI는 막대한 데이터를 빠르게 학습해 이같은 보편성을 결과값으로 낼 수 있다"며 "카카오브레인 등이 파포스 프로젝트의 피드백을 반영해 AI 모델을 추가 학습시키기만 하면 되는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개발자의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초등학생의 단순한 경험(데이터)만으로도 시로 풀어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으니까요. 반면 인간의 감정은 아직 AI가 따라할 수 없는 인간 고유의 영역이라는 반론도 만만찮습니다. 언젠가는 AI가 이런 시를 쓰는 날이 올 지 궁금해지네요.선한결 기자 alway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