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향토방위하던 의병들, 관군과 합동 전국적 전투 전개…전공 다툼으로 고초 겪거나 전쟁 후에 숙청당하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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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S12
(107) 임진왜란서 조선을 구한 의병 (下)
의병들, 전쟁에서의 역할
의병들의 전국적인 활동으로 전선이 확대된 일본군은 병력을 집중할 수 없었고, 많은 지역을 포기해야 했다. 의병들은 지형지물을 활용하고 백성들의 협조를 받아 유격전을 펼쳤다. 일본군의 허를 찌르거나 전진과 후퇴의 길목을 장악해 혼란을 유발했고, 일본군은 수성전을 선호하면서 전선은 교착상태에 이르렀다. 조선은 철저한 신분제도와 학정, 당파싸움으로 인해 전쟁 전에도 임꺽정(林巨正)의 난 등 민란이 발생했고, 전쟁 도중에도 ‘이몽학의 난’이 일어났다. 정부와 관군을 불신한 백성들은 떠돌다가(유망) 포로로 잡혀 부역했고, 심지어는 ‘순왜’로 변신해 적에 협조했다. 의병은 이들을 흡수해 전력을 이뤘고, 민심을 수습하는 데도 공을 세웠다.그렇다면 생명까지 바쳤던 의병들은 가치와 명예를 지키면서 전투에 몰두하고, 전후에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을까?그들과 관군은 군대 체계, 운영 방식, 특히 향리에서 벌이는 작전 방식 등에서 차이가 컸으며 상호 불신과 전공의 다툼 때문에 갈등이 적지 않았다. 전쟁 초기에는 의병의 전과가 관군을 능가했다. 따라서 패전과 무능, 직무유기의 책임을 져야 할 정치인과 직업군인들에게 의병의 존재는 매우 거북했을 것이다. 그래서 의병은 점차 해체되고, 관군에 흡수됐다.
전투 중에 전사한 조헌, 김시민, 고경명 등의 의병장들은 명예를 얻고, 후손들은 실질적인 혜택을 받았다. 반면에 관군과 다투거나 정부의 의견을 경시했던 의병장들은 비참했다. 형과 함께 거병해 뛰어난 전과를 세운 김덕령은 ‘이몽학의 난’과 연루됐다는 모함을 받아 전쟁 중에 체포돼 고문을 받다가 26세의 나이로 죽었다.
전투 성과 거두고 고초 겪기도
내부의 갈등과 경제의 어려움 등은 결국 국내 문제이므로 인(仁)·예(禮)·지(智)가 필요할 뿐이지만, 냉정한 국제관계는 생존의 문제와 직결된다. 만약 머지않아 ‘의’와 ‘의병’이 필요해지는 상황이 촉발된다면 어떻게 될까? 책임질 이유가 없는 젊은 세대, 다가올 미래의 주역인 어린 세대의 생각과 행동이 궁금하다.역사학자로서 의병들에게 질문을 드리고 싶다. 의병 활동에 참여한 것을 후회하십니까? 전쟁이 끝난 뒤의 조선을 저세상에서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드셨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