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들면 중국서 잘 팔렸는데…삼성·현대차가 주는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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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 수교 30년, 협력에서 경쟁으로19일 베이징 둥청구 '현대회·베이징(现代薈·北京)'. 현대자동차가 베이징 중심가 왕푸징의 고급 쇼핑몰 둥팡신톈디에 이달 초 개장한 브랜드 스토어다. 브랜드 스토어는 판매보다는 브랜드 이미지 강화에 주력하는 매장이다.
성장만큼 변화 빠른 中 시장
삼성·현대차 성쇠가 주는 교훈
30년 1위 폭스바겐도 위기
'가성비 대명사' 샤오미도 자국 시장선 고전
둥팡신톈디에는 이미 웨이라이(NIO), 웨이마, BMW 등의 브랜드 스토어가 들어서 있다. 현대차가 브랜드 스토어를 낸 것은 2002년 중국에 진출한 이후 20년 만이다. 경쟁사들에 비하면 상당히 늦은 시도다. 현대회·베이징에는 현대차가 수입 판매하는 대형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 팰리세이드, 수소전기차인 넥쏘와 관련 기술, 고성능차 N라인업 등이 전시돼 있다. 현대차의 중국 브랜드인 베이징현대의 차량은 찾아볼 수 없다. 현대차가 중국에서 겪고 있는 상황을 간접적으로 읽을 수 있는 장면이다.
양적 성장에 치중한 현대차
현대차는 베이징시 국유기업인 베이징자동차와의 합자법인인 베이징현대를 설립하면서 중국 시장에 발을 들였다. 국유기업과의 합작은 초기엔 축복이었다. 베이징시는 관내 택시를 베이징현대의 아반떼와 쏘나타로 교체하는 등 전폭적으로 지원했다. 베이징현대의 중국시장 순위는 설립 7년 만인 2009년 4위(점유율 6.8%)로 뛰었다.현대차가 성장하던 시기의 중국은 '만들면 팔리는' 시장이었다. 2000년 214만대였던 중국 자동차 시장은 2010년 1806만대로 연평균 24%씩 커졌다. 2009년에는 미국을 제치고 세계 최대 시장이 됐다. 2010년을 전후해 시장은 완전히 달라졌다. 2021년까지 연평균 성장률은 4%로 떨어졌다. SUV 열풍, 가성비(가격 대비 성능)를 갖춘 토종 민간 브랜드의 약진, 전기자동차 보급 확대 등 질적 변화가 빠르게 나타났다. 현대차는 그러나 2015년 4공장과 5공장을 연달아 짓는 등 양적 성장에 매달렸다. 전 현대차그룹 고위 임원은 "당시 생산설비를 늘릴 게 아니라 브랜드 가치를 높이는데 주력했어야 했다"며 아쉬워했다.
관료조직에 가까운 베이징차와의 협력 관계는 어느새 걸림돌이 됐다. 사소한 일도 합의를 봐야 하는 구조 속에 현대차의 대응은 번번이 시기를 놓쳤다. 2017년 사드(고고도미사일 방어체계) 보복 당시에도 파트너인 베이징차 측은 '내 일 아니다'는 식으로 대응했다. 시장의 축이 전기차로 이미 이동했지만 베이징현대는 수년째 내부 검토만 하고 있다. 전기차 현지 생산은 빨라야 내년 말로 예상된다.
2016년 114만대였던 베이징현대의 판매량은 지난해 38만대로 급감했다. 현대차그룹은 지난 2~3년 간 인원 재배치, 라인업 조정 등을 실시하며 중국시장 전략을 원점부터 다시 정비했다. 현대차 중국법인 관계자는 “브랜드 스토어 개장은 작은 일일 수 있지만 이를 계기로 중국 내 브랜드 파워를 끌어올려 점유율을 회복하겠다”고 말했다. 중국에서 고전하는 건 현대차만이 아니다. 30여년 1위를 달려오던 폭스바겐은 2020년과 2021년, 올 상반기까지 3기 연속 판매량이 15%씩 줄었다. 전기차 전환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탓이다. 1980년대 중국에 진출한 미국 SUV 브랜드 지프도 올해 중국 시장 포기를 선언했다.
자고 나면 순위 바뀌는 스마트폰
삼성전자의 스마트폰 사업도 중국에서 발전과 쇠퇴를 경험한 대표 한국기업 사례로 꼽힌다. 2009년 중국에서 스마트폰을 팔기 시작한 삼성전자는 3년 만인 2012년 시장점유율 1위로 올라섰다. 현재 점유율은 1% 미만이다. 선전의 아시아 최대 전자제품 상권인 화창베이에선 한때 몇 개 상가 건물이 삼성 스마트폰과 액세서리만 취급할 정도였다. 지금은 중국 토종 브랜드들로 가득 차 있다.중국의 스마트폰 시장 역시 10년여 동안 극적으로 바뀌었다. 2012년 점유율 상위 5대 브랜드 중 2021년에 남아있는 업체는 애플뿐이다. '가성비의 대명사' 샤오미도 글로벌 시장에선 2~3위를 달리지만 자국에선 오포와 비보에게 밀린다. 올해 들어선 화웨이에서 분사한 아너가 빠르게 부상하고 있다.삼성 스마트폰이 중국에서 실패한 요인은 '브랜드에서 애플에 뒤지고, 가성비에선 중국폰에 밀렸다'로 요약된다. 갈수록 거세지는 애국주의는 중국 소비재 시장에서 외국기업의 입지를 더욱 축소시키고 있다.
삼성은 중간재 중심으로 전략을 수정했다. 중국 투자도 계속 확대했다. 1992년 진출 이후 2012년까지 20년 동안 누적 투자액은 120억달러였다. 이후 작년까지 9년 투자액은 380억달러다. 삼성전자 시안 반도체 공장, 삼성전기 톈진 적층세라믹콘덴서(MLCC) 공장 등 굵직한 투자를 지속했다. 삼성이 스마트폰을 한 대 파는 것보다 삼성 반도체와 디스플레이를 단 중국 스마트폰이 5대 팔리는 게 안정성이나 수익성에서 더 나을 수 있다는 게 업계의 분석이다.
소비재 장사를 대폭 줄였지만 삼성 계열사들이 중국 시장에서 올리는 매출은 계속 늘어나는 추세다. 삼성전자의 중국 매출은 2016년 32조원에서 지난해 59조원으로 두 배 가까이 커졌다. 삼성전기는 샤오미에서 매년 1조원의 매출을 올린다.
고소득층 공략 성공한 K푸드
중국 시장은 여전히 빠르게 변하고 있다. 소득 수준이 올라가면서 고급 소비재 수요는 폭발적으로 늘고 있다. 중국 수입식품 시장에서 김, 과일주스, 홍삼 등 다수 영역에서 한국산 식품이 1위를 달리고 있다. 한국산 김은 고소득층의 어린이 간식으로 주목받으면서 지난해 수입액이 전년 대비 두 배 넘게 늘었다.서울우유, 연세우유 등 한국산 냉장우유는 중국 고급 백화점이나 마트 우유코너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 중국 우유 소비 트렌드가 멸균우유에서 생우유로 전환하면서 기존에 고급으로 통하던 호주·독일산 멸균우유 자리를 냉장 수출이 가능한 한국산이 대체하고 있는 것이다. 어린이용 음료 시장에선 '뽀로로' 캐릭터를 앞세운 팔도 어린이 음료가 대세로 자리잡았다. 'K콘텐츠'의 확장 사례로 꼽힌다. 홍창표 KOTRA 중국본부장은 "한국 제품은 중국에서 품질은 여전히 인정받지만 가성비는 본토나 동남아에, 브랜드는 일본이나 유럽에 밀린다는 평가도 나온다"며 "차별화를 통해 독자적인 위치를 확보해야 중국 시장에서 오래 살아남을 수 있다"고 분석했다.
베이징=강현우 특파원 hk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