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람에서 요람으로’ 순환경제에서 길 찾는 패션업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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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업계에도 지속가능성 바람이 불고 있다. 패스트 패션으로 대표되는 대량 생산, 대량 소비, 대량 폐기의 악순환을 끊고 환경 부담을 낮추려는 노력이 확산되고 있다. 공급망 인권 강화와 제품 생산에서 재활용까지 순환경제 모델로 전환하는 것이 핵심 과제다[한경ESG] ESG NOW 패션은 유행에 민감한 산업이다. 시즌별로 상품이 쏟아져 나오고, 품절된 상품은 또 다른 상품이 대체한다. 한 철만 입고 버려진 옷은 결국 플라스틱 쓰레기로 남는다. 또 UN의 발표에 따르면, 패션산업은 전 세계 온실가스 배출량의 약 8%를 차지한다. 연간 물 사용량은 1조5000억 리터에 달한다. 제작 과정부터 유통, 폐기까지 끊임없이 환경 부담을 생산하는 산업인 셈이다.
아동노동, 노동착취 등 인권 관련 문제도 계속 발생하고 있다. 2013년에 있었던 방글라데시 라나플라자 의류 제조단지 붕괴사고는 전 세계 패션산업이 어떠한 희생 위에 있는지 알게 한 사건이었다. 세계적 패스트 패션 브랜드의 공급망이던 건물이 무너지는 동안 노동자들은 260원의 시급을 받기 위해 일하고 있었다. 건물의 붕괴를 알고 있었음에도 관리자들은 노동을 강요했고, 일하지 않으면 한 달 치 시급을 삭감하겠다고 협박했다.
패션과 지속가능성이 공존할 수 있을까. 이러한 의문이 꾸준히 제기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특히 자라, H&M 같은 대형 패스트 패션 브랜드의 등장으로 문제는 더 거대하고 복잡하게 변해왔다. 다행인 점은, 인권의 사각지대에 놓인 노동자와 기후변화, 환경파괴에 대한 패션산업의 책임을 묻는 목소리도 함께 커지고 있다는 점이다. 패션업계도 더 윤리적이고 더 환경적인 생산 방식을 모색하며 변화에 나서고 있다. 에코백의 재탄생
환경보호의 상징 에코백도 새로운 변화를 시작했다. 디자이너 안야 힌드마치가 2007년 선보인 캔버스천 가방에는 ‘I’m Not a Plastic Bag(나는 플라스틱 가방이 아니다)’라는 문구가 적혀있었다. 비닐봉지 대신 반복해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든 이 가방은 ‘에코백’의 원조라는 타이틀을 달고 선풍적 인기를 끌었다.
가죽을 사용하지 않고 별도 가공이 필요없기에 꾸준히 사용하면 환경 부담을 덜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은 단순한 패션 아이템으로 그 상징적 의미가 퇴색됐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영국 환경청은 에코백이 환경보호 효과를 내려면 적어도 131회 이상 사용해야 한다고 발표했다.2020년 안야 힌드마치는 일회용 플라스틱을 가방으로 만드는 ‘나는 플라스틱 가방이다’ 프로젝트를 새롭게 시작했다. 0.5L 플라스틱병 32개를 작은 알갱이로 만들고 실로 엮은 다음 재활용 윈드스크린(PVB)으로 코팅해 가방의 손상을 막는다. 안야 힌드마치는 웹사이트 통해 “단순히 플라스틱을 줄인다는 문제 인식에서 공급망 자체의 순환성을 이루어내는 것으로 기업 미션을 바꾼 것”이라고 밝혔다. 글로벌 컨설팅업체 에코액트와 협력해 프로젝트와 관련한 탄소배출량도 측정하고 있다.
비즈니스 전환과 함께 지속가능성과 순환 전략을 목표로 설정한 기업도 있다. 랄프 로렌은 지난 6월 <2022 글로벌 시티즌십·지속가능성 보고서>를 발표하며 2030년까지 자사의 모든 제품을 책임 있게 관리하겠다는 내용을 담은 ‘Live on’ 선언을 했다. 랄프 로렌은 기존의 순환 전략과 함께 ‘순환경제를 위한 디자인’, ‘순환경제 소비자 참여’, ‘순환경제 발전 지원’ 등 3가지 목표를 내세웠다.
리사이클 소재 늘리고 탄소배출 줄인다랄프 로렌은 2025년까지 이 순환 전략에 따라 5가지 C2C(Cradle-to-Cradle, 요람에서 요람으로) 상품을 출시할 계획이다. C2C란 제품 생산에서 재활용되기까지 전과정을 포함하는 제품의 수명주기를 말한다. 랄프 로렌은 지난해 물 낭비를 막을 수 있는 제로 폐수 염색 시스템 ‘Color on Demand’를 출시했다. 염색 공정에서 물 사용량을 최대 40%, 화학물질은 85%, 에너지 사용률은 90% 이상 줄일 수 있는 솔루션이다. 랄프 로렌은 2025년까지 면 제품 80% 이상에 이 시스템을 도입할 계획이다. 영국 럭셔리 패션 브랜드 멀버리는 지난해 4월 22일 세계 지구의 날에 ‘메이드 투 라스트(Made to Last)’ 공약을 내놓았다. 2035년까지 공급망 전체를 재생 가능하고 순환하는 모델로 전환해 탄소배출량 제로를 달성한다는 계획이다. 멀버리는 가죽을 이용한 사업을 하는 만큼 축산업에서 배출하는 탄소배출량까지 점검하고 있다.
그렇게 만든 것이 멀버리 최초의 탄소중립 컬렉션 ‘릴리 제로’다. 2010년부터 생산한 시그너처 가방 중 하나인 릴리 컬렉션에 탄소중립을 더한 것이다. 생애주기 전체에서 발생하는 탄소배출량을 측정하고, 줄일 수 있는 방법을 찾아 적용했다.
멀버리는 기존 제조·사용·폐기로 이어지는 선형 접근 방식을 벗어나 생산 이후 최대한 오랫동안 가치를 복원해 사용할 수 있는 순환적 접근 방식을 강조한다. 멀버리가 운영하는 멀버리 익스체인지 프로그램은 수선, 용도 변경 등을 통해 제품의 수명을 연장하고 새로운 주인을 찾아줄 수 있도록 지원한다.
투명성을 기반으로 색다른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을 펼치는 곳도 있다. 미국 온라인 의류 브랜드 에버레인은 제품 제작에 들어가는 모든 비용을 공개하는 ‘트루코스트(True Cost)’ 정책을 선언했다. 원단가, 부자재, 인건비, 관세 등 제품 생산에 사용되는 모든 비용을 공개해 소비자들이 직접 원가와 판매가의 차이를 보고 구매할 수 있도록 했다.
탄소발자국도 줄인다. 에버레인은 2030년까지 제품당 탄소배출량을 2019년 대비 55%까지 감축하고, 각 매장 및 본사의 절대 배출량은 2019년 대비 45%까지 줄이겠다고 발표했다. 2050년까지 탄소중립을 달성한다는 목표도 세웠다. 올해는 모든 공급망에서 플라스틱을 퇴출하겠다고 선언했다. 매년 환경영향 보고서를 작성해 어떤 점이 개선됐고, 어떤 점에서 아쉬움이 있었는지 솔직하게 공유하기도 한다.
환경과 사회의 지속가능성을 기반으로 설립된 기업도 있다. 파타고니아는 ‘지구를 되살리기 위한 사업’을 목표로 50년간 그 미션을 실천해왔다. 전 제품은 친환경 소재로 제작한다. 리사이클 소재가 50% 이상 포함된 ‘레트로 × 재킷’, 수명을 다한 티셔츠를 수거해 새로운 티셔츠로 만드는 ‘티-사이클(Tee-cycle)’ 등을 출시하며 지속가능 상품 개발도 꾸준히 이어가고 있다.
환경보호가 곧 기업 미션
파타고니아는 ‘이 재킷을 사지 마세요(Don’t buy this jacket)’ 같은 파격적 광고로 오히려 소비자의 시선을 끌기도 했다. 브랜드 세일과 함께 폭발적 소비를 기대해야 하는 블랙프라이데이에 펼쳐진 광고였다. 새로운 구매를 지양하는 옷을 오래 입자는 파타고니아의 원웨어(Worn Wear) 캠페인과도 결을 같이한다. 지난 9월 창업자인 이본 슈나드 회장은 30억 달러 규모의 보유 지분 전체를 환경단체와 비영리재단에 기부했다. 스텔라 매카트니는 동물 가죽을 사용하지 않는 대표적 브랜드다. 지난해 매카트니는 론칭 20주년을 맞아 어카운터빌리티부터 제로 웨이스트까지 브랜드에 담긴 신념을 정리한 ‘A to Z 성명서’를 발간했다. 26개 키워드를 선정해 그 키워드에 해당하는 26가지 룩을 26명의 아티스트와 함께 만드는 대규모 프로젝트였다. 모든 컬렉션은 재생 캐시미어, 비동물성 소재, 빈티지 원단을 재활용하는 등 지속가능한 재료에 대한 연구가 돋보인다.
매카트니는 사무실과 매장 내에서도 재생에너지를 사용하고 있다. 영국 내 모든 매카트니 매장은 풍력에너지를 사용하며, 해외 매장의 45%는 재생에너지로 운영된다. 여러 환경단체와 파트너십을 맺기도 했으며, 10월엔 비영리 자선단체 ‘스텔라 매카트니 케어 파운데이션’을 설립한 뒤 환경보호와 유방암 관련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패션산업의 변화는 이미 시작됐다. 하지만 패션과 지속가능성의 괴리는 단숨에 좁혀지지 않는다. 추호정 서울대 생활과학대학 교수는 “환경친화적 기업경영과 제품 개발의 필요성은 많은 기업이 공감하지만, 기술적·재무적 어려움으로 실제 적용하기까지는 속도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또 “더 많은 소비자가 동참하려면 제품의 정확한 환경정보 제공이 필요하다”고 전했다.
[현장 돋보기]베를린, 지속가능 패션의 허브가 되다
베를린이 지속가능 패션의 허브로 떠오르고 있다. 베를린 패션 거리로 알려진 미테를 중심으로 지속가능성을 표방한 업사이클링 및 친환경 패션 브랜드들이 대거 포진해 있다. 실제로 올해 베를린 패션 위크 행사에는 지속가능한 패션을 지향하는 박람회 ‘네오니트(Neonyt)’가 함께 개막하기도 했다.
지속가능 패션을 소개하는 특별한 투어 프로그램도 있다. 베를린, 쾰른, 뮌헨 등 독일 내 다양한 지역의 ‘그린패션’을 소개하는 GFT(The Green Fashion Tour)다. GFT는 글로벌 공급망, 순환경제, 재활용, 인권 등 다양한 주제에 맞는 아틀리에나 프로젝트를 소개하고, 지속가능한 패션 확산을 이끄는 NGO이기도 하다. GFT는 순환경제, 환경 인식, 공정 패션, 혁신, 지역 상생, 중고, 사회·문화적 접근, 지속가능한 보석, 투명성 등을 기반으로 매장을 선정하고, 실제로 운영자나 아티스트를 만나 인터뷰도 진행한다.
‘에콜프(ECOALF)’는 GFT의 대표적 파트너사다. 에콜프는 ‘두 번째 지구는 없다(Because there in no planet B)’라는 슬로건으로 환경에 대한 패션의 책임을 강조했다. 폐플라스틱, 폐나일론, 폐양털, 커피 가루 등 300개 이상의 재활용 소재를 개발해 의류나 가방으로 재탄생 시킨다. 에콜프에서 생산하는 모든 의류에는 회사 슬로건과 함께 ‘하나의 에콜프 의류에는 70개 폐플라스틱을 사용한다’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여러 가지 지속가능 브랜드를 한데 모은 편집숍도 있다. 미테에 위치한 ‘슬로 프라이데이(Slow Friday)’에는 암드엔젤스, 에콜프, EYD 등 다양한 브랜드가 입점한 곳이다. 입구부터 ‘무엇이 당신의 옷을 만드는가(What made your clothes?)’라는 도발적 문구와 ‘100% fair, 100% Sustainable’이라는 표시가 눈길을 끈다.슬로 프라이데이를 운영하는 헨드릭 롤링 대표는 “지속가능한 패션은 고객이 옷이나 신발을 선택할 때 고려하는 새로운 선택지가 됐다. 지속가능성을 이야기하는 브랜드들이 패스트 패션 브랜드 사이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고객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그게 우리가 미테 거리를 선택한 이유다”라고 말했다.
조수빈 기자 subin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