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순철의 글로벌 북 트렌드] '나는 이야기한다, 고로 존재한다'…인류를 만든 것은 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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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러티브 브레인 (Das narrative Gehirn)인간의 기억은 얼마나 믿을 만한가? 1932년 영국 케임브리지대 실험심리학 교수였던 프레더릭 바틀릿이 한 가지 실험을 했다. 북미 인디언 전설에 관한 이야기를 한 사람에게 들려주고, 그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도록 했다. 그렇게 일곱 차례 다음 사람에게 이야기가 전해졌다.
영웅담은 승리를 기대하도록 만들고
해피엔딩 스토리는 도덕적으로 살게 해
"이야기는 사회·공동체 문화·행동 결정"
바틀릿 교수가 처음 사람에게 들려줬던 이야기와 피실험자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달돼 제일 마지막에 들은 사람이 전하는 이야기가 과연 같았을까? 그는 이 실험 결과를 <기억: 실험심리학 및 사회심리학 연구>(1932)라는 논문에 소개했다. 그리고 기억이 어떤 사건과 경험에 대한 객관적 사실이라기보다는 문화적 태도와 개인적 습관에 따라 구성 및 재구성된 무의식적 산물이라는 것을 밝혀냈다.지난 6월 독일에서 출간돼 주요 서점 인문 분야 베스트셀러에 오른 <내러티브 브레인(Das narrative Gehirn)>은 미국 인디애나대에서 인지과학을 가르치며 다양한 심리 실험을 수행하고 있는 프리츠 브라이트하우프트가 쓴 책이다. 책은 이야기를 만들고, 이야기를 기억하고, 이야기를 전달하는 인간 ‘호모 나랜스(Homo Narrans)’에 대해 말한다. 인간에게 이야기가 어떤 의미와 가치를 지니는지, 그리고 이야기와 기억 사이에는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지 밝힌다. ‘나는 이야기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고 선언하며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하는 것이 이야기라고 강조한다.책에 의하면 인간은 이야기 없이 살아갈 수 없는 존재다. 인류의 모든 지혜는 이야기를 통해 전달됐다. 인간은 이야기를 통해 세상에 닻을 내린다. 이야기를 통해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하고 풍요로운 삶을 꾸려나간다. 이야기는 또한 개인과 사회를 연결하고, 공동체의 문화와 행동양식을 결정한다. 인간의 기억은 팩트와 스토리가 서로 연결되거나 교차하면서 만들어진다.
내러티브가 어떻게 사람의 생각이나 감정을 조종하고, 세상을 더 나은 방향으로 바꿀 수 있는지 설명하는 부분은 정신을 바짝 차리게 만든다. 저자는 우리가 결국 내러티브가 만든 세계 속에서 살고 있다고 강조한다. 내러티브는 우리가 마음껏 상상의 나래를 펼치도록 자극하기도 하지만 어떤 감정을 일으키거나 억압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해피엔딩 스토리는 도덕적으로 옳은 감정을 갖도록 안내한다. 호기심으로 가득한 이야기는 경이로움을 부추긴다. 슬픈 이야기는 감정적 카타르시스로 이어진다. 모험과 영웅 이야기는 우리가 승리를 기대하도록 만들고, 사랑 이야기는 얼마간의 실랑이 이후에 에로틱한 성취가 있을 것이라고 상상하도록 한다. 책은 이렇게 특정한 이야기 구조가 우리에게 자동반사적 감정 반응을 일으키고 있다는 점을 환기하며 내러티브의 올바른 방향성에 대해 질문한다.수천 명의 피실험자가 참가하는 심리 실험, 여러 문학 작품의 내러티브에 대한 분석 그리고 일상에서 발생하는 각종 소문의 탄생과 확산에 관한 이야기까지 ‘이야기하는 인간’의 정체성을 탐구하는 책의 여정은 지루할 틈이 없다. 왠지 답답하고 삭막한 지금의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한 이야기가 그리워진다.
홍순철 BC에이전시 대표·북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