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장인열전] 흙과 불로 빚어내는 예술혼…이종성 사기장

투각·백자·청자 두루 섭렵…2013년 충북 무형문화재 지정
"깨지고 금간 국보급 도자기 재현·전시하는게 마지막 과업"
도예가는 도자기를 닮아가는 걸까. 그의 손끝에서 만들어지는 도자기처럼 장인한테서 묻어나는 이미지는 단아했다.

충북 충주시 엄정면 충주도자기마을에 자리 잡은 원광전통도예연구소의 이종성(64) 사기장.
흙 그릇이 1천300℃ 안팎의 고열을 견뎌낸 뒤 도자기로 재탄생하듯 그도 생명력을 지닌 도자기를 빚기 위해 인고의 세월을 보냈다.

그가 역작 중 하나로 꼽는 '백자 당초문 이중투각 유개호'는 고고하고 우아한 자태를 자랑한다. 충주박물관이 소장한 이 작품은 목단의 꽃과 잎, 줄기 문양을 한치의 불균형도 허용치 않고 조화롭게 펼쳐냈다.

푸르스름한 기운을 품어 처연하기까지 한 이 백자 투각 작품은 그의 삶을 오롯이 투영한다.
인천 태생인 그는 채 철이 들기도 전인 16살 때 흙을 처음 만졌다. 세세한 가정사를 들여다볼 필요도 없이 오직 생계를 위한 선택이었다.

중학교 2학년을 중퇴한 그는 검정고시를 목표로 주경야독의 길을 택했다.

1974년 인천의 한 도자기 공방에 취업했지만, 월급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공부에 집중할 수도 없었다.

여기저기 도예원과 생활자기 회사를 전전하며 도자기 기술을 익히다가 1983년 인생이 전기를 맞는다.

경기도 무형문화재 제5호였던 고(故) 호산 안동오 선생을 사사하며 비로소 정통 도예가의 길로 들어설 수 있었다.

호산 선생 문하에서 7년간 머물며 조선백자의 정수를 전수했다.

스승이 작고한 이듬해인 1990년부터 광주의 한 도예원을 맡아 운영하던 그는 1993년 용인으로 거처를 옮긴다.

원광도자기라는 이름의 도예원을 차린 그는 활발히 작업하며 자신의 도자기 철학을 정립했다.

백자는 물론 청자, 청화백자, 투각, 분청사기 등 전통 도예를 두루 섭렵하며 작품 활동을 했다.

어려서부터 이곳저곳 공방을 전전하며 배운 도자기 기술이 빛을 발했다.

이 사기장은 "그 시절에는 분야를 가리지 않고 이것저것 다 만들었다"고 했다.

비엔날레 참석 등 활발한 외부 활동을 병행하며 도예가로서의 입지를 굳히면서 도예촌 건립을 꿈꾸기도 했다.

도예가 50명을 모아 도자기의 부흥을 꾀하려고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결국 지인의 알선으로 2004년 충주로 거처를 옮긴 뒤 다른 곳에는 한눈팔지 않고 오로지 작품 활동에만 매진했다.
그 결과 제11회 대한민국 청자공모전 특선, 제36회 대한민국 전승공예대전 특선, 제30회 대한민국 미술대전 특선 등을 거머쥐면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고, 2013년 충북 무형문화재 제10호 사기장으로 지정됐다.

이 사기장은 아직도 전통 기법을 고수하고 있다.

특히 편한 전기가마 대신 흙가마 만을 고집한다.

흔히 흙과 불의 예술이라 불리는 도자기를 제대로 구워내기 위해서는 전기가마나 가스가마로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전기가마에서는 청자가 잘 안 나와요.

가마 안에 불꽃을 채워 넣어야 유약이 제 색깔을 낼 수 있습니다.

미세한 온도 차이로 도자기를 망칠 수 있기 때문에 가마를 땔 때면 신경이 곤두서지요"
장작은 오직 잘 마른 소나무만을 사용한다.

화력이 좋으면서 재가 적게 생기는 소나무는 도자기용 장작으로 그만이다.

900℃에서 10시간가량 초벌구이를 한 그릇은 유약 처리를 거쳐 24시간 이상 1천300℃ 안팎의 고온을 견딘 뒤에야 도자기로 변신한다.

자칫 가마 안으로 바람이 들어가면 청자의 경우 누런 색깔로 변하는 등 탈이 나게 마련이다.

불질이 문제없이 이뤄졌어도 미세한 금이나 얼룩 등 하자가 발견되면 가차 없이 망치질이 가해진다.

"불을 끈 뒤 2∼3일 지나 가마를 열 때면 가슴이 조마조마합니다.

좋은 작품이 나오면 기쁘죠. 그 희열 때문에 평생 이 일을 합니다"
이 사기장이 가장 정성을 쏟는 자기는 투각이다.

도자 기술 중 최고의 난도를 요구하는 투각은 예리한 도구로 흙을 파내어 문양을 표현하는 화려한 조형기법이다.

특히 내호에 외호를 덧씌우는 이중 투각 작품은 문양 작업은 물론 가마 안에서 굽는 과정에서도 변형과 파손이 잦아 도예가의 숙련된 기술과 고도의 집중력이 요구된다.
투각 도예가로 손꼽히는 그도 한 달에 한 두 점 만들기가 버겁다고 한다.

50년 가까이 도자기 외길을 걸어온 이 사기장은 어떤 도예 철학을 지니고 있을까.

투각을 포함해 평생 마음에 드는 작품이 10점도 안 된다고 하는 이 사기장이지만 둥글고 여유로운 백자 달항아리를 닮은 듯 '걸작'에 대한 욕심은 별로 없다.

예술작품으로서의 도자기보다는 사람들에게 널리 쓰이는 생활용품으로서 기능해야 한다는 생각이 확고하기 때문이다.

이 사기장은 "고고한 미를 지닌 매병도 옛날에는 술이나 물을 담는 용도로 쓰였을 것"이라며 "도자기가 플라스틱을 대체하는 생활용품으로 널리 쓰였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라고 말했다.

그의 이런 인식은 도예의 경제성과도 무관치 않다.

겉보기에 화려한 도예가의 길이지만 경제적으로는 이 사기장의 세속적 삶에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도예가의 주 수입원인 전시회도 지인들에게 부담이 갈까 봐 평생 5번 여는 데 그쳤다.

충북도가 무형문화재에게 후계자 양성 지원금으로 매달 지급하는 100만원이 생활비의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니 장인의 생활고가 쉽게 짐작이 된다.

이런 척박한 환경에 놓인 전승 제자 2명의 앞날도 이 사기장으로서는 걱정거리다.

그럼에도 이 사기장은 도예가로서 꼭 이루고 싶은 과업이 있다고 한다.

청자 투각 칠보문 향로(국보 제95호), 백자 청화 투각 모란당초문 항아리(국보 제240호) 등 깨지거나 금이 가는 등 온전한 형태를 갖추지 못한 국보 도자기들을 원형 그대로 재현하는 일이다. 이 사기장은 "내가 좋아서 업으로 삼았지 명성을 얻거나 돈 많이 벌어 잘 살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며 "다만 혼자 힘으로 가능할지는 모르지만, 국립박물관 등이 소장한 도자기들을 재현해 나만의 갤러리에 전시하고 싶은 꿈이 있다"라고 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