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 일본은 지금 '시(時)성비' 시대

정영효 도쿄 특파원
여섯 살이 안 된 어린아이를 두고 맞벌이하는 일본 엄마의 10명 중 8명은 ‘시간 빈곤자’다. 이시이 가요코 게이오대 부교수가 연구 보고서를 통해 붙인 이름이다. 육아와 가사 때문에 하루에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시간이 부족한 직장인을 말한다.

6세 미만의 아이 1명을 둔 일본인 가정이 가사와 육아, 장보기 등 필수 활동에 쏟는 시간은 하루 평균 8시간으로 집계됐다. 맞벌이 남성의 17.4%, 여성의 80.9%가 집안일과 아이 키우기에 허덕이느라 자유 시간을 갖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다.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따르면 일본인이 직장 업무 등 유상노동에 쓰는 시간은 하루 평균 363분으로 주요 7개국(G7) 가운데 가장 길었다. 177분인 이탈리아의 두 배가 넘었다. ‘유럽의 일벌레’ 독일(248분)에 비해서도 2시간가량 더 길었다.

일 많이 하는 일본인

반면 수면과 식사, 휴식 등 개인 시간(620분)과 놀이 및 스포츠에 쓰는 여가시간(278분)은 가장 짧았다. 프랑스인은 일본인보다 하루에 2시간 이상 많은 개인 시간(752분)을 갖는 것으로 나타났다. 일본을 제외하면 여가시간이 가장 부족한 독일인(331분)도 일본인보다 매일 53분을 더 놀거나 운동하는 데 썼다. 이렇게 시간에 쫓기는 일본인들이 시간을 아껴주는 상품에 기꺼이 지갑을 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가성비(가격 대비 성능)의 시대를 넘어 시성비(시간 대비 성능)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의 인기 칼럼니스트 나카무라 나오후미는 “코로나19로 집에서 머무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가사와 육아에 쏟는 시간을 줄이려는 수요가 더 강해졌다”고 분석했다.

간편조리세트(밀키트)와 가정간편식(HMR)의 보급은 이미 옛날얘기다. 일본인들이 주식이라고 부를 만큼 많이 먹는 카레는 냄비에 졸이는 전통 조리법 대신 프라이팬에 굽는 제품의 점유율이 10%까지 늘었다. 졸이는 대신 구우면 조리 시간을 절반 이하로 줄일 수 있다. 전자제품 대리점에서는 냄비 하나로 볶기, 조리기, 찌기 등 아홉 가지 조리법이 가능한 다기능 상품이 인기다.

'0초 라멘'까지 등장

시성비 상품의 백미는 ‘0초 라멘’이다. 이름 그대로 봉지를 뜯자마자 먹을 수 있는 일본 라면이다. 닛세이식품이 지난 4월 ‘0초 치킨라멘’이라는 이름으로 내놓자마자 매진됐다. 먹는 시간을 줄이려는 젊은 세대의 트렌드에 딱 들어맞은 상품이라는 점이 인기 비결로 꼽힌다.

‘라면땅’과 같은 라면과자나 라면스프를 뿌린 봉지라면과 별다를 게 없어 보이지만 닛세이식품 관계자는 “어디서나 한 손으로 먹을 수 있는 라멘”이라고 강조한다. 먹기 편하도록 짠맛을 줄이는 등 식품으로 대접받기 위한 나름의 개선 사항도 추가됐다.

시성비를 따지는 건 일본뿐 아니라 세계적인 소비 트랜드다. 정보기술(IT)의 발달 덕분에 현대인들은 생활이 편리해진 한편 넘쳐나는 정보를 습득하느라 정신없이 바쁘기 때문이다. 최근 아마존닷컴이 로봇청소기 룸바의 제조사인 미국 마이로봇을 인수하고, 일본 화장품 품평 사이트인 ‘@코스메’ 운영사의 최대 주주가 된 것은 대표적인 시성비 투자라고 나카무라 칼럼니스트는 평가했다. 가사 및 육아 부담을 덜어주고 제품 선택에 고민하는 시간을 줄여주는 기업에 투자했다는 것이다.

생활 리듬이 훨씬 빠른 한국인의 시성비 수요는 일본보다 훨씬 폭발적일 전망이다. 한국 기업들이 소비자를 사로잡는 시성비 코드가 무엇인지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