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나가는 VC 심사역 6인 "스타트업 투자할 땐 이것부터 본다" [긱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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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근마켓·오늘의집·마켓컬리·직방... 내로라하는 스타트업들도 '새싹'인 시절이 있었습니다. 스타트업 투자정보 업체 더브이씨에 따르면 올 상반기 이뤄진 1199건의 투자 라운드 중 40%인 479건이 프리 시리즈A 이하의 초기 스타트업 대상이었습니다. 유니콘으로 무럭무럭 자라는 꿈을 그리고 있을 이 회사들, 투자자들은 어떻게 선택했을까요? 한경 긱스(Geeks)가 6명의 초기투자 전문 심사역을 만나봤습니다. 스타트업에 투자하는 벤처캐피털(VC)은 대표적인 모험자본(Venture Capital)이다. 위험이 뒤따르지만 그만큼 큰 수익을 기대할 수 있다.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가진 스타트업을 모험하듯 발굴한다. 특히 시드~프리 시리즈A 단계 투자는 모험자본의 정수로 통한다. 이 단계의 극초기 스타트업들은 언제든 '문을 닫을' 위험성이 도사리고 있어서다. 하지만 스타트업이 성장하면 그만큼 얻을 수 있는 열매도 달콤하다.
데스밸리에서 허덕이던 크래프톤에 초기 투자하며 구원투수로 나섰던 VC들은 지난해 이 회사가 상장하자 수십~수백 배의 차익을 얻었다. 당근마켓, 직방, 버킷플레이스(오늘의집) 등 내로라하는 유니콘 기업(기업가치 1조원 이상 비상장사)의 초기 투자자들도 '잭팟'을 터뜨리기 일보직전이다. 가시밭길을 함께 건너온 경영진과 쌓인 친밀감은 덤이다.
초기 스타트업들은 성과를 재무제표와 같은 '숫자'로 나타낼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제품이 시장에 나오지 않은 회사도 많다.이 단계 스타트업들에 투자하는 심사역들은 '사람'을 보고 투자한다고 입을 모은다. 대표를 비롯한 경영진의 역량에 중점을 둔다는 말이다. 마치 이상형을 묻는 질문에 '매력적인 사람'이라고 답하는 것처럼 추상적이다. 한경 긱스가 강기현 패스트벤처스 파트너, 한정봉 블루포인트 수석심사역, 장원열 카카오벤처스 수석심사역, 허정주 스파크랩 팀장, 박재성 캡스톤파트너스 팀장, 박형수 퓨처플레이 책임심사역을 만나 투심을 이끌어낸 '이상형 스타트업'들에 대해 들어봤다.
한정봉 블루포인트 수석심사역 역시 '현실 인식'을 강조했다. 빠른 속도로 변하는 시장에 유연하게 대처하려면 회사의 역량을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는 "지금은 완벽한 '슈퍼맨'들이 모인 팀처럼 보이더라도 1년 뒤에 똑같은 모습이라면 의미가 없다"며 "슈퍼맨들 사이에서 스스로 부족한 점을 찾아낸 뒤 주어진 리소스(자원)를 가지고 어떻게 발전할지 로드맵을 제시하는 팀이 매력적"이라고 설명했다.
이를 기반으로 한 빠른 '실행력' 역시 심사역들이 공통적으로 내세운 포인트다. 빨리 해보고, 강 파트너는 "첫 미팅 이후 일주일 간격으로 대표를 다시 만나면 일주일 사이에 많은 시도를 해 본 용기 있는 회사가 있는 반면, 한 달이 지나도 똑같은 말과 행동을 하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장원열 카카오벤처스 수석심사역은 "제품 출시 전 베타 테스트 기간에 데이터에 기반한 의사 결정을 빠르게 하지 못하면 오히려 실수가 늘어나게 된다"며 "사업 초반엔 소비자들의 피드백을 듣고 수정하는 과정이 제일 중요한데 엄청나게 시간을 잡아먹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데이터에 기반한 '정량적 의사결정'은 매출이나 거래액 같은 방대한 지표가 아니더라도, AB테스트나 일간 이용자 수(DAU), 월간 이용자 수(MAU) 등 회사가 갖고 있는 최소한의 데이터를 말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대표가 시장을 증명해내야 한다고 했다. 10조원짜리 시장이라면, 왜 그정도 규모가 나오는지 숫자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는 "기업설명회(IR)를 다녀보면 단순히 언론이나 보고서에서 언급된 10조원 규모 시장을 그대로 설명하는 분들이 있는데, 투자자들이 원하는 건 간단한 인용이 아닌 시장에 대한 깊은 이해도"라며 "흘러가는 돈이 10조원인건지, 매출 규모를 합친 게 10조원인건지, 잠재 고객수가 몇 명이고 어느 정도의 침투율을 갖고 10조원이란 숫자에 도달하는건지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허정주 팀장 역시 대표의 '시장 파악 능력'을 중요하게 바라봤다. 이 역시 대표의 경험에서 비롯된다는 설명이다. 특정 시장에서 오랫동안 일을 한 경험을 토대로 무엇이 부족한지, 문제가 무엇인지 부딪혀 본 뒤에 이를 해결하기 위한 아이템을 만들어내는 대표가 매력적이라는 주장이다.
강기현 파트너도 시장을 바라보는 능력에 주목했다. 그는 "해외에는 있는 매력적인 아이템이 국내에 없는 경우, 또는 국내에 있는 아이템이지만 대기업만 시장을 점유하고 있는 경우에 이 빈틈을 파고드는 팀을 좋아한다"고 했다.
박형수 퓨처플레이 심사역은 인력 구성이 적절히 이뤄진 팀을 선호한다고 했다. 이를테면 기술 기반 스타트업엔 종종 대표가 최고경영책임자(CEO)임에도 최고기술책임자(CTO)의 '핏'에 더 잘맞는 경우가 생긴다. 이를 빠르게 인지하고 CEO의 역할을 할 수 있는 인력을 초기에 영입해야 한다는 설명이다.
그는 또 "개발자 출신 대표가 사업 기획까지 겸하는 사례도 봤다"며 "이런 상황들을 마주할 때 빠르게 C레벨 인력들을 정리히는 게 중요하다"고 했다. 이어 "'돈이 생기면' 그때 하면 된다는 식으로 인력 채용을 미루는 팀도 있는데, 지양해야 할 자세라고 본다"고 덧붙였다.
강기현 파트너는 올 초 투자한 엠제트큐컴퍼니를 꼽았다. 회원 전용 프라이빗 별장 브랜드 '모자이크' 운영사다. 독채 별장에 회원권 방식을 결합한 '공유 별장' 사업모델로 주목받았다. 미국에서 비슷한 사업모델을 통해 유니콘 기업 반열에 오른 파카소가 있는 것을 재빨리 캐치한 점이 주효했다. 그는 "아이템을 정한 뒤 국내에서 사업을 하려면 법적인 문제 등 여러 이슈를 검토하느라 정신이 없을 것 같은 와중에도 홍천이나 제주 같은 곳을 발벗고 뛰어다니는 모습을 봤다"며 "뭘 해도 될 것 같다는 느낌을 주는 팀이었다"고 회상했다.
한정봉 수석심사역은 지난해 투자한 자율주행 기술 스타트업 반프를 예로 들었다. LS전선 사내 벤처 출신으로 타이어에 센서를 부착해 실시간으로 타이어 상태와 노면 정보를 분석할 수 있는 기술을 가진 회사다. 그가 주목한 점은 이 회사가 사업적으로 가장 '임팩트'를 줄 수 있는 시장을 찾았다는 것이다. 그는 "이 팀은 자율주행차 시대가 오면 24시간 내내 운행하는 자동차가 나타날 것이고, 그렇게 되면 타이어와 노면 상태로 인한 안전 문제가 불거질 것이라는 사실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고 했다.
박재성 팀장은 원격 커뮤니케이션 플랫폼인 '트로우' 개발사 드랍더비트에 투자했다. 트로우는 원격 회의를 실시간으로 저장하고, 화면을 캔버스처럼 이용해 메모를 하거나, 음성을 텍스트로 자동으로 변환해주는 기능을 갖췄다. 과거 코딩 스타트업을 만들어 네이버에 매각한 연쇄 창업가인 데다가 글로벌 시장에서 통할 만한 아이템을 내놓은 게 투심을 사로잡았다.
메타버스 다중채널네트워크(MCN) 플랫폼 스타트업 벌스워크는 박형수 심사역의 포트폴리오 회사다. 네이버제트가 투자해 주목받았다. 이 회사는 게임과 엔터테인먼트 영역이 겹쳐 있는 메타버스 분야의 특성을 잘 파악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이를테면 가상현실(VR) 세계에서 시청자와 소통하는 크리에이터인 '우왁굳'의 활동 영역을 게임으로 봐야할지, 엔터테인먼트로 봐야할지, 애매한 구조를 정확히 파악한 회사"라고 평가했다.
허정주 팀장의 애정이 담긴 포트폴리오사는 콘텐츠 커머스 플랫폼 셀러밀 운영사인 패스트뷰다. 초기 기업임에도 흑자 경영을 하던 이 회사는 허 팀장이 역으로 투자를 받으라고 설득한 사례다. 우선 두 명의 공동 창업자가 모두 콘텐츠 분야에서 오랫동안 실무를 익힌 점이 매력으로 다가왔다. 콘텐츠 제작과 광고만으로도 충분히 수익을 낼 수 있었지만 회사는 '도전'을 선택했다. 콘텐츠를 활용해 크리에이터와 플랫폼 사업자 양측에게 모두 수익을 제공한다는 새로운 사업모델을 도입했다. 현업을 경험해 본 사람만이 생각해낼 수 있는 모델이라는 게 허 팀장의 말이다.
장원열 수석심사역의 선택은 개그맨 허경환이 창업한 허닭이다. 허 대표는 데이터에 기반한 의사결정을 했다. 장 수석심사역은 "기존 F&B 회사는 제품의 기획·생산 과정에서 '감'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았다"며 "허닭은 철저히 데이터를 기반으로 수요를 예측하는 등 이 부분에 강점이 있었다"고 했다.
유니콘으로 클 수 있는 유망 스타트업들을 떡잎을 넘어 새싹부터 발굴해낼 수 있다는 점도 매력이라는 설명이다. 인내는 쓰지만, 그만큼 열매는 더 달다. 박재성 팀장은 "다른 사람들이 알아봐주기 전에 내가 이 회사를 본 안목이 맞아떨어졌다는 걸 알게 되면 희열이 더 크다"고 했다. 허정주 팀장도 "시장에서 이름이 한 번도 거론되지 않은 숨어있는 회사를 '찐'으로 옥석 가리듯 캐낼 수 있는 것"이라고 했다.
강기현 파트너는 "시작을 같이한다는 건 가장 오래 동행하는 파트너가 된다는 것을 의미하고, 회사와도 한층 더 긴밀한 관계를 쌓을 수 있다"고 했다. 이어 "매일 새롭고 큰 꿈을 가진 대표들을 만나며 나도 에너지를 얻는다"고 덧붙였다. 장원열 수석심사역은 "모든 스타트업이 그렇듯 성장 과정에서 몇 번의 위기를 겪게 되는데, 이를 함께하면서 대표와의 친밀감을 쌓는다"며 "같이 술 한 잔을 기울이며 고민을 나누면서 함께 성장하는 것"이라고 했다.
한정봉 수석심사역은 "태풍이 치더라도 바다 밑은 고요한 것처럼 시장에 본격적으로 진입하지 않은 초기 스타트업은 상대적으로 영향을 덜 받는다"며 "수면 위로 초기 기업들이 등장할 정도로 성장한다면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겠지만 오히려 객관적인 평가를 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일종의 기회"라고 평가했다.
박재성 팀장 역시 투자 위축기가 초기 기업에게 기회가 될 수 있다고 봤다. 그동안의 활황기가 투자 허들을 과도하게 낮췄을 뿐이라는 설명이다. 그는 "정말 유망한 스타트업들은 오히려 VC가 돈을 싸들고 맞이할 것"이라며 "과거엔 여러 회사 중 한 곳에 투자하지 못하면 다른 곳에 투자하면 되는 환경이었지만, 이제는 소수의 회사에 VC들이 몰려드는 경우가 생기고 있다"고 했다.
박형수 심사역도 "위기는 기회"라고 했다. 유동성이 넘칠 땐 투자 과정을 여러 투자자들이 검토하다 보니 호흡이 빠르고 시간에 과도하게 쫓겼지만, 지금은 '비정상의 정상화'를 거치는 시기라는 말이다. 장원열 수석심사역 역시 "투자 속도가 느려지지는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허정주 팀장은 초기 스타트업들이 무언가를 증명해내야 할 때라고 했다. 매출이 아니더라도 중단기 목표치와 같은 일종의 지표를 내걸고 체계적인 검증을 받아야 한다는 설명이다. 또 유동성이 부족해지면서 추가적인 자금 조달이 어려워질 수 있음을 인지하고 유연하게 대처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는 "이전엔 연속적인 펀딩을 통해 빠르게 성장하는 시나리오만 그렸다면, 이제는 성장을 일부 포기하더라도 어떻게 생존해나갈지를 고민해야 할 시점"이라고 말했다.
참, 한가지 더
그들은 어쩌다 심사역이 됐을까
강기현 패스트벤처스 파트너는 지난해 30대 초반의 나이로 파트너 심사역이 됐다. 업계에선 이례적으로 빠른 승진이다. VC 설립과 동시에 파트너로 영입되는 경우가 아닌 이상 심사역으로서 파트너급으로 올라가기까지는 통상 7~8년 이상이 소요된다.
강 파트너는 대학 시절엔 모바일 커머스 스타트업 엠버스에 창업 멤버로 참여했다. 스타트업이란 용어가 막 떠오르던 2010년대 초였다. 이후 네이버 본사와 라인에서 근무했다. 전통적 대기업과는 다른 스타트업의 '날카로움'을 보고 업계에 뛰어들겠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2018년 패스트벤처스에 합류했다.
한정봉 블루포인트 수석심사역은 블루포인트가 첫 직장이다. KAIST에서 기술경영 석사과정을 마쳤다. 블루포인트가 테크(기술) 기반 액셀러레이터인 만큼 KAIST 내 창업 동아리와도 협업을 자주 했다. 유망 기술과 시장을 잇는 가교 역할을 투자업계에서 할 수 있을 거라 보고 블루포인트에서 대학원생 인턴으로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박재성 캡스톤파트너스 팀장은 경제학을 전공했다. 뱅크오브아메리카증권 애널리스트로 첫 커리어를 시작했다. 이후 시카고 VC인 테크넥서스에서 VC매니저로 2년간 일했다. 대기업이 출자자(LP)로 돈을 댄 펀드를 컨설팅하며 스타트업 발굴을 도왔다. VC업계에서 경험을 쌓은 박 팀장은 이후 기업의 돈에 의존하지 않고 독립적인 의사결정을 하고싶단 생각을 갖고 캡스톤파트너스에 합류했다.
미국 존스홉킨스대에서 국제관계학을 전공한 허정주 스파크랩 팀장은 졸업 이후 진로 고민에 빠졌다. 한국으로 돌아와 한국외대 통번역학 석사 과정을 지냈다. 처음엔 프리랜서 통역사로 일했다. 우연한 기회에 스타트업 행사에서 통역 업무를 맡았고, 스타트업업계에 처음 관심을 갖게 됐다. 이후 중국계 VC인 IDG캐피탈에서 후기 스타트업 투자 심사역으로 합류해 2년간 일했다. 그 뒤엔 초기 스타트업을 발굴하는 데에 더 관심이 갔고, 2019년 스파크랩에 입사했다.
박형수 퓨처플레이 심사역은 올해 초 입사했다. 스타트업과는 애초 친숙했다. 직방에 인수된 셰어하우스우주의 2012년 창업멤버다. 이후 재창업도 고민했지만 보다 꾸준히 창업 생태계를 도울 수 있는 일을 찾고 싶었다. 다양한 산업을 두루 둘러보고 사람을 만나는 걸 좋아하는 성격이다. 그가 평소 취미처럼 즐기는 일을 '직업'으로 가질 수 있는 게 심사역이었다. 장원열 카카오벤처스 수석심사역은 신영증권 애널리스트 출신이다. 시장 리서치 역량을 강화하려던 카카오벤처스와 연이 닿았다. 애널리스트로서의 삶과 심사역으로서의 삶은 같은 듯 다르다는 게 그의 말이다. 기업을 A부터 Z까지 분석해야하는 것은 같지만, 애널리스트는 특정 '분야'에 한정될 수밖에 없었다. 초기투자 전문 심사역은 다양한 업종을 깊고 넓게 볼 수 있다는 게 만족스럽다고 했다.
김종우 기자 jongwoo@hankyung.com
데스밸리에서 허덕이던 크래프톤에 초기 투자하며 구원투수로 나섰던 VC들은 지난해 이 회사가 상장하자 수십~수백 배의 차익을 얻었다. 당근마켓, 직방, 버킷플레이스(오늘의집) 등 내로라하는 유니콘 기업(기업가치 1조원 이상 비상장사)의 초기 투자자들도 '잭팟'을 터뜨리기 일보직전이다. 가시밭길을 함께 건너온 경영진과 쌓인 친밀감은 덤이다.
초기 스타트업들은 성과를 재무제표와 같은 '숫자'로 나타낼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제품이 시장에 나오지 않은 회사도 많다.이 단계 스타트업들에 투자하는 심사역들은 '사람'을 보고 투자한다고 입을 모은다. 대표를 비롯한 경영진의 역량에 중점을 둔다는 말이다. 마치 이상형을 묻는 질문에 '매력적인 사람'이라고 답하는 것처럼 추상적이다. 한경 긱스가 강기현 패스트벤처스 파트너, 한정봉 블루포인트 수석심사역, 장원열 카카오벤처스 수석심사역, 허정주 스파크랩 팀장, 박재성 캡스톤파트너스 팀장, 박형수 퓨처플레이 책임심사역을 만나 투심을 이끌어낸 '이상형 스타트업'들에 대해 들어봤다.
"아는 척 하는 대표는 일단 거른다"
강기현 패스트벤처스 파트너는 '지적 겸손함'을 갖춘 대표가 매력적이라고 설명했다. 회사와 산업에 대해 무엇을 모르는지를 명확히 알고 있고, 그 사실을 드러내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대표가 그의 '픽'이다. 그는 "미팅을 하면 투자자에게 밀리지 않으려고 모르는 데도 아는 척을 하는 게 보이는 대표들이 계신다"며 "성장한 스타트업들의 대표들은 공통적으로 '이 부분은 잘 모르겠다. 가르쳐달라'고 말하는 사람"이라고 했다.허정주 스파크랩 팀장도 "심사역이 임직원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회사의 고민을 진심으로 나누고, 도움을 요청해주는 대표들이 있다"며 "나도 사람이다보니 이런 분들께는 더 깊게 다가가게 된다"고 했다.한정봉 블루포인트 수석심사역 역시 '현실 인식'을 강조했다. 빠른 속도로 변하는 시장에 유연하게 대처하려면 회사의 역량을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는 "지금은 완벽한 '슈퍼맨'들이 모인 팀처럼 보이더라도 1년 뒤에 똑같은 모습이라면 의미가 없다"며 "슈퍼맨들 사이에서 스스로 부족한 점을 찾아낸 뒤 주어진 리소스(자원)를 가지고 어떻게 발전할지 로드맵을 제시하는 팀이 매력적"이라고 설명했다.
이를 기반으로 한 빠른 '실행력' 역시 심사역들이 공통적으로 내세운 포인트다. 빨리 해보고, 강 파트너는 "첫 미팅 이후 일주일 간격으로 대표를 다시 만나면 일주일 사이에 많은 시도를 해 본 용기 있는 회사가 있는 반면, 한 달이 지나도 똑같은 말과 행동을 하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장원열 카카오벤처스 수석심사역은 "제품 출시 전 베타 테스트 기간에 데이터에 기반한 의사 결정을 빠르게 하지 못하면 오히려 실수가 늘어나게 된다"며 "사업 초반엔 소비자들의 피드백을 듣고 수정하는 과정이 제일 중요한데 엄청나게 시간을 잡아먹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데이터에 기반한 '정량적 의사결정'은 매출이나 거래액 같은 방대한 지표가 아니더라도, AB테스트나 일간 이용자 수(DAU), 월간 이용자 수(MAU) 등 회사가 갖고 있는 최소한의 데이터를 말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시장 규모는 얼마?...이 질문에 정확히 답해야"
대표의 경험도 중요하게 작용했다. 스타트업을 키워본 경험이 있는 '연쇄 창업가'이거나 창업한 분야에서 일을 해 온 사람을 선호한다는 뜻이다. 박재성 캡스톤파트너스 팀장은 "창업자가 이전에 기업가치 300억원 정도까지 회사를 성장시킨 적이 있다면 확실한 투자 매리트로 작용한다"고 했다.그는 대표가 시장을 증명해내야 한다고 했다. 10조원짜리 시장이라면, 왜 그정도 규모가 나오는지 숫자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는 "기업설명회(IR)를 다녀보면 단순히 언론이나 보고서에서 언급된 10조원 규모 시장을 그대로 설명하는 분들이 있는데, 투자자들이 원하는 건 간단한 인용이 아닌 시장에 대한 깊은 이해도"라며 "흘러가는 돈이 10조원인건지, 매출 규모를 합친 게 10조원인건지, 잠재 고객수가 몇 명이고 어느 정도의 침투율을 갖고 10조원이란 숫자에 도달하는건지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허정주 팀장 역시 대표의 '시장 파악 능력'을 중요하게 바라봤다. 이 역시 대표의 경험에서 비롯된다는 설명이다. 특정 시장에서 오랫동안 일을 한 경험을 토대로 무엇이 부족한지, 문제가 무엇인지 부딪혀 본 뒤에 이를 해결하기 위한 아이템을 만들어내는 대표가 매력적이라는 주장이다.
강기현 파트너도 시장을 바라보는 능력에 주목했다. 그는 "해외에는 있는 매력적인 아이템이 국내에 없는 경우, 또는 국내에 있는 아이템이지만 대기업만 시장을 점유하고 있는 경우에 이 빈틈을 파고드는 팀을 좋아한다"고 했다.
박형수 퓨처플레이 심사역은 인력 구성이 적절히 이뤄진 팀을 선호한다고 했다. 이를테면 기술 기반 스타트업엔 종종 대표가 최고경영책임자(CEO)임에도 최고기술책임자(CTO)의 '핏'에 더 잘맞는 경우가 생긴다. 이를 빠르게 인지하고 CEO의 역할을 할 수 있는 인력을 초기에 영입해야 한다는 설명이다.
그는 또 "개발자 출신 대표가 사업 기획까지 겸하는 사례도 봤다"며 "이런 상황들을 마주할 때 빠르게 C레벨 인력들을 정리히는 게 중요하다"고 했다. 이어 "'돈이 생기면' 그때 하면 된다는 식으로 인력 채용을 미루는 팀도 있는데, 지양해야 할 자세라고 본다"고 덧붙였다.
"그렇게 우리가 픽한 회사들은 여기"
스타트업의 매력 포인트를 바탕으로 6명의 심사역들이 '픽'한 회사들은 어디일까.강기현 파트너는 올 초 투자한 엠제트큐컴퍼니를 꼽았다. 회원 전용 프라이빗 별장 브랜드 '모자이크' 운영사다. 독채 별장에 회원권 방식을 결합한 '공유 별장' 사업모델로 주목받았다. 미국에서 비슷한 사업모델을 통해 유니콘 기업 반열에 오른 파카소가 있는 것을 재빨리 캐치한 점이 주효했다. 그는 "아이템을 정한 뒤 국내에서 사업을 하려면 법적인 문제 등 여러 이슈를 검토하느라 정신이 없을 것 같은 와중에도 홍천이나 제주 같은 곳을 발벗고 뛰어다니는 모습을 봤다"며 "뭘 해도 될 것 같다는 느낌을 주는 팀이었다"고 회상했다.
한정봉 수석심사역은 지난해 투자한 자율주행 기술 스타트업 반프를 예로 들었다. LS전선 사내 벤처 출신으로 타이어에 센서를 부착해 실시간으로 타이어 상태와 노면 정보를 분석할 수 있는 기술을 가진 회사다. 그가 주목한 점은 이 회사가 사업적으로 가장 '임팩트'를 줄 수 있는 시장을 찾았다는 것이다. 그는 "이 팀은 자율주행차 시대가 오면 24시간 내내 운행하는 자동차가 나타날 것이고, 그렇게 되면 타이어와 노면 상태로 인한 안전 문제가 불거질 것이라는 사실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고 했다.
박재성 팀장은 원격 커뮤니케이션 플랫폼인 '트로우' 개발사 드랍더비트에 투자했다. 트로우는 원격 회의를 실시간으로 저장하고, 화면을 캔버스처럼 이용해 메모를 하거나, 음성을 텍스트로 자동으로 변환해주는 기능을 갖췄다. 과거 코딩 스타트업을 만들어 네이버에 매각한 연쇄 창업가인 데다가 글로벌 시장에서 통할 만한 아이템을 내놓은 게 투심을 사로잡았다.
메타버스 다중채널네트워크(MCN) 플랫폼 스타트업 벌스워크는 박형수 심사역의 포트폴리오 회사다. 네이버제트가 투자해 주목받았다. 이 회사는 게임과 엔터테인먼트 영역이 겹쳐 있는 메타버스 분야의 특성을 잘 파악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이를테면 가상현실(VR) 세계에서 시청자와 소통하는 크리에이터인 '우왁굳'의 활동 영역을 게임으로 봐야할지, 엔터테인먼트로 봐야할지, 애매한 구조를 정확히 파악한 회사"라고 평가했다.
허정주 팀장의 애정이 담긴 포트폴리오사는 콘텐츠 커머스 플랫폼 셀러밀 운영사인 패스트뷰다. 초기 기업임에도 흑자 경영을 하던 이 회사는 허 팀장이 역으로 투자를 받으라고 설득한 사례다. 우선 두 명의 공동 창업자가 모두 콘텐츠 분야에서 오랫동안 실무를 익힌 점이 매력으로 다가왔다. 콘텐츠 제작과 광고만으로도 충분히 수익을 낼 수 있었지만 회사는 '도전'을 선택했다. 콘텐츠를 활용해 크리에이터와 플랫폼 사업자 양측에게 모두 수익을 제공한다는 새로운 사업모델을 도입했다. 현업을 경험해 본 사람만이 생각해낼 수 있는 모델이라는 게 허 팀장의 말이다.
장원열 수석심사역의 선택은 개그맨 허경환이 창업한 허닭이다. 허 대표는 데이터에 기반한 의사결정을 했다. 장 수석심사역은 "기존 F&B 회사는 제품의 기획·생산 과정에서 '감'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았다"며 "허닭은 철저히 데이터를 기반으로 수요를 예측하는 등 이 부분에 강점이 있었다"고 했다.
혁신을 눈앞에서
심사역들은 초기 투자만의 매력으로 '변화의 최전선'에 설 수 있다는 점을 들었다. 박형수 심사역은 "정말 상상초월할 정도"라며 "'세상이 이렇게나 혁신적으로 바뀌어가고 있구나'라는 것을 몸소 느낄 수 있는 몇 안되는 분야가 초기 투자"라고 설명했다. 강기현 파트너 역시 "초기 투자는 스타트업업계를 최전방에서 볼 수 있는 곳"이라면서 "식견을 넓히는 데는 이만한 직업이 없다"고 했다.유니콘으로 클 수 있는 유망 스타트업들을 떡잎을 넘어 새싹부터 발굴해낼 수 있다는 점도 매력이라는 설명이다. 인내는 쓰지만, 그만큼 열매는 더 달다. 박재성 팀장은 "다른 사람들이 알아봐주기 전에 내가 이 회사를 본 안목이 맞아떨어졌다는 걸 알게 되면 희열이 더 크다"고 했다. 허정주 팀장도 "시장에서 이름이 한 번도 거론되지 않은 숨어있는 회사를 '찐'으로 옥석 가리듯 캐낼 수 있는 것"이라고 했다.
강기현 파트너는 "시작을 같이한다는 건 가장 오래 동행하는 파트너가 된다는 것을 의미하고, 회사와도 한층 더 긴밀한 관계를 쌓을 수 있다"고 했다. 이어 "매일 새롭고 큰 꿈을 가진 대표들을 만나며 나도 에너지를 얻는다"고 덧붙였다. 장원열 수석심사역은 "모든 스타트업이 그렇듯 성장 과정에서 몇 번의 위기를 겪게 되는데, 이를 함께하면서 대표와의 친밀감을 쌓는다"며 "같이 술 한 잔을 기울이며 고민을 나누면서 함께 성장하는 것"이라고 했다.
불어오는 투자 한파... 초기 스타트업엔?
이들은 '투자 겨울'이 왔다는 우려가 나오지만 한파가 유망 스타트업의 발목을 잡지는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밸류에이션(기업가치 평가)이 전반적으로 낮아지는 경향은 있지만 초기 투자자들이 투자를 꺼리지는 않는다는 게 업계 평가다.한정봉 수석심사역은 "태풍이 치더라도 바다 밑은 고요한 것처럼 시장에 본격적으로 진입하지 않은 초기 스타트업은 상대적으로 영향을 덜 받는다"며 "수면 위로 초기 기업들이 등장할 정도로 성장한다면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겠지만 오히려 객관적인 평가를 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일종의 기회"라고 평가했다.
박재성 팀장 역시 투자 위축기가 초기 기업에게 기회가 될 수 있다고 봤다. 그동안의 활황기가 투자 허들을 과도하게 낮췄을 뿐이라는 설명이다. 그는 "정말 유망한 스타트업들은 오히려 VC가 돈을 싸들고 맞이할 것"이라며 "과거엔 여러 회사 중 한 곳에 투자하지 못하면 다른 곳에 투자하면 되는 환경이었지만, 이제는 소수의 회사에 VC들이 몰려드는 경우가 생기고 있다"고 했다.
박형수 심사역도 "위기는 기회"라고 했다. 유동성이 넘칠 땐 투자 과정을 여러 투자자들이 검토하다 보니 호흡이 빠르고 시간에 과도하게 쫓겼지만, 지금은 '비정상의 정상화'를 거치는 시기라는 말이다. 장원열 수석심사역 역시 "투자 속도가 느려지지는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허정주 팀장은 초기 스타트업들이 무언가를 증명해내야 할 때라고 했다. 매출이 아니더라도 중단기 목표치와 같은 일종의 지표를 내걸고 체계적인 검증을 받아야 한다는 설명이다. 또 유동성이 부족해지면서 추가적인 자금 조달이 어려워질 수 있음을 인지하고 유연하게 대처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는 "이전엔 연속적인 펀딩을 통해 빠르게 성장하는 시나리오만 그렸다면, 이제는 성장을 일부 포기하더라도 어떻게 생존해나갈지를 고민해야 할 시점"이라고 말했다.
참, 한가지 더
그들은 어쩌다 심사역이 됐을까
강기현 패스트벤처스 파트너는 지난해 30대 초반의 나이로 파트너 심사역이 됐다. 업계에선 이례적으로 빠른 승진이다. VC 설립과 동시에 파트너로 영입되는 경우가 아닌 이상 심사역으로서 파트너급으로 올라가기까지는 통상 7~8년 이상이 소요된다.
강 파트너는 대학 시절엔 모바일 커머스 스타트업 엠버스에 창업 멤버로 참여했다. 스타트업이란 용어가 막 떠오르던 2010년대 초였다. 이후 네이버 본사와 라인에서 근무했다. 전통적 대기업과는 다른 스타트업의 '날카로움'을 보고 업계에 뛰어들겠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2018년 패스트벤처스에 합류했다.
한정봉 블루포인트 수석심사역은 블루포인트가 첫 직장이다. KAIST에서 기술경영 석사과정을 마쳤다. 블루포인트가 테크(기술) 기반 액셀러레이터인 만큼 KAIST 내 창업 동아리와도 협업을 자주 했다. 유망 기술과 시장을 잇는 가교 역할을 투자업계에서 할 수 있을 거라 보고 블루포인트에서 대학원생 인턴으로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박재성 캡스톤파트너스 팀장은 경제학을 전공했다. 뱅크오브아메리카증권 애널리스트로 첫 커리어를 시작했다. 이후 시카고 VC인 테크넥서스에서 VC매니저로 2년간 일했다. 대기업이 출자자(LP)로 돈을 댄 펀드를 컨설팅하며 스타트업 발굴을 도왔다. VC업계에서 경험을 쌓은 박 팀장은 이후 기업의 돈에 의존하지 않고 독립적인 의사결정을 하고싶단 생각을 갖고 캡스톤파트너스에 합류했다.
미국 존스홉킨스대에서 국제관계학을 전공한 허정주 스파크랩 팀장은 졸업 이후 진로 고민에 빠졌다. 한국으로 돌아와 한국외대 통번역학 석사 과정을 지냈다. 처음엔 프리랜서 통역사로 일했다. 우연한 기회에 스타트업 행사에서 통역 업무를 맡았고, 스타트업업계에 처음 관심을 갖게 됐다. 이후 중국계 VC인 IDG캐피탈에서 후기 스타트업 투자 심사역으로 합류해 2년간 일했다. 그 뒤엔 초기 스타트업을 발굴하는 데에 더 관심이 갔고, 2019년 스파크랩에 입사했다.
박형수 퓨처플레이 심사역은 올해 초 입사했다. 스타트업과는 애초 친숙했다. 직방에 인수된 셰어하우스우주의 2012년 창업멤버다. 이후 재창업도 고민했지만 보다 꾸준히 창업 생태계를 도울 수 있는 일을 찾고 싶었다. 다양한 산업을 두루 둘러보고 사람을 만나는 걸 좋아하는 성격이다. 그가 평소 취미처럼 즐기는 일을 '직업'으로 가질 수 있는 게 심사역이었다. 장원열 카카오벤처스 수석심사역은 신영증권 애널리스트 출신이다. 시장 리서치 역량을 강화하려던 카카오벤처스와 연이 닿았다. 애널리스트로서의 삶과 심사역으로서의 삶은 같은 듯 다르다는 게 그의 말이다. 기업을 A부터 Z까지 분석해야하는 것은 같지만, 애널리스트는 특정 '분야'에 한정될 수밖에 없었다. 초기투자 전문 심사역은 다양한 업종을 깊고 넓게 볼 수 있다는 게 만족스럽다고 했다.
김종우 기자 jongw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