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용카드 강국' 한국 카드사들도 뛰어드는 '디지털 외상' BNPL [긱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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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카드 없이 후불·할부 결제 가능'지금 사고 돈은 나중에 내세요(Buy Now Pay Later·BNPL).' 아마존, 나이키, 애플, 월마트 등 내로라 하는 브랜드가 요즘 빠짐 없이 내걸고 있는 문구다. BNPL은 소비자가 상품을 우선 구매한 뒤 일정 기간 후에 대금을 갚는 결제 방식이다. 당장 수중에 돈이 없더라도 물건을 살 수 있게 하는 일종의 '디지털 외상'인 셈이다.
해외선 'MZ세대 소비 뉴노멀'로 부상
'카드 강국' 한국서도 틈새 비집고 속속
빅테크 이어 카드사들도 적극 나서
롯데카드, 베트남 BNPL 진출 선언
과소비·연체 부추기는 부작용 우려도
카드 없이 후불·할부 결제를 할 수 있는 BNPL은 씬 파일러(금융 이력이 거의 없는 사람)나 사회 초년생처럼 신용카드 발급은 어렵지만 소비 욕구는 큰 젊은 세대가 손쉽게 신용 거래를 할 수 있는 서비스로 각광받기 시작했다. 뒤집어 보면 신용카드 보급률이 90%에 달하고 카드를 이용한 간편결제도 보편화된 한국에선 BNPL이 파고들 틈이 상대적으로 좁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런데 올 들어 국내에서도 다양한 형태의 BNPL 서비스가 속속 등장하기 시작했다. 특히 빅테크·핀테크와 전자상거래 플랫폼 등에 이어 최근에는 카드사들이 직접 BNPL 시장에 뛰어들고 있다. BNPL을 신용카드의 대체재가 아닌, 미래 카드 소비자를 선점할 보완적인 서비스로 바라보기 시작한 것이다.
해외 BNPL 시장 진출을 선언한 카드사도 등장했다. 롯데카드는 '베트남의 쿠팡'으로 불리는 이커머스 기업 티키와 손잡고 베트남에서 BNPL 서비스를 출시하기로 했다. 금융 접근성이 낮은 대신 젊은 층의 디지털 결제가 활발하고 소비 수요가 큰 베트남의 잠재력을 노렸다.
해외선 'MZ세대 소비 뉴노멀'로
BNPL은 코로나 팬데믹에 따른 전자상거래 시장 급증과 맞물려 해외에선 'MZ세대 소비의 뉴노멀'로 자리 잡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BNPL을 이용하면 신용카드와 달리 까다로운 신용 조회 절차가 없고, 할부 이자나 수수료도 없이 일정 기간에 걸쳐 물건 값을 나눠 낼 수 있다. 그러다 보니 금융 이력이 부족하고 소득은 적지만 소비 욕구는 큰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큰 인기를 끌었다. 영국 컨설팅 기업 글로벌데이터에 따르면 2019년 330억달러(43조원)였던 전 세계 BNPL 거래액은 지난해 1200억달러(156조2400억원)로 급증했다. 뱅크오브아메리카는 3년 내 이 규모가 최대 1조달러로 성장할 것이란 전망을 내놓기도 했다. BNPL은 소비자가 가맹점에서 상품을 구매하면 소비자 대신 결제업체가 가맹점에 물건값을 전액 지불하고, 소비자는 결제업체에 구매대금을 나눠 갚는 구조다. 연체 없이 제때 내면 할부 이자나 수수료도 없다. 페이팔·어펌 등은 소비자가 연체를 해도 연체 이자마저 안 물린다.대신 BNPL 업체는 가맹점으로부터 5~6%의 수수료를 받는다. 비자·마스터카드 등 카드사 수수료보다 두 배가량 높지만, 카드가 없는 사람에게 물건을 더 많이 팔 수 있으니 가맹점으로서도 손해는 아니다. 미국 BNPL 업체 어펌에 따르면 어펌의 BNPL 서비스를 제공하는 가맹점은 그렇지 않은 가맹점보다 매출이 20% 늘었다. BNPL 시장의 무서운 성장세에 세계 최대 간편 결제기업인 페이팔과 비자·아메리칸익스프레스·씨티그룹 등 기존 금융사들도 앞다퉈 뛰어들었다. 애플 역시 온·오프라인 어디서나 애플페이 가맹점이면 2주마다 대금을 네 번에 나눠 낼 수 있는 '애플페이 레이터'를 연내 출시하기로 했다.
'신용카드 있는데 굳이…' 심드렁하던 국내서도 속속
이제까지 한국은 얘기가 조금 달랐다. 신용카드 발급이 상대적으로 수월하고 무이자 할부도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는 한국에선 신용카드와 기능이 비슷한 BNPL을 굳이 쓸 필요가 낮다는 게 전반적인 인식이었다.하지만 지난해를 기점으로 분위기가 달라지는 모양새다. 신용카드는 없지만 소비 욕구가 큰 Z세대를 겨냥해 국내서도 BNPL 서비스가 속속 등장했다. 핀테크 스타트업 오프널이 국내 최초 BNPL 서비스 '소비의미학'을 선보였고 네이버파이낸셜·카카오페이·토스·쿠팡 등 빅테크들도 잇달아 뛰어들었다. 각자의 간편결제 서비스인 'OO페이'를 키우는 것은 물론 카드 이용을 못하는 소비자를 묶어두는 '락인(lock-in)' 효과를 노린 것이다. Z세대 소비자를 빼앗길 위기에 처한 카드사들도 BNPL 진출에 시동을 걸었다. 현대카드는 지난 7월 운동화 리셀 플랫폼 솔드아웃에 BNPL 서비스인 '카드없이 분할결제'를 카드사 최초로 도입했다. 말 그대로 신용카드 없이도 세 번에 걸쳐 물건값을 나눠낼 수 있는 서비스다. 카드사로서의 장점을 살려 네·카·토는 못하는 분납 결제를 지원하는 게 특징이다. 국민카드도 결제대행사 다날과 함께 BNPL 서비스를 준비 중이다. 한 카드사 관계자는 "결제의 형태가 급격하게 바뀌고 또 다양해지는 상황에서 카드사들도 씬파일러를 포괄할 수 있는 BNPL 서비스에 마냥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다"며 "카드사들은 신용 평가, 연체 관리 등이 본업인 만큼 BNPL 업체들보다 더 정교한 서비스가 가능할 것"이라고 했다.
베트남 BNPL 시장 겨냥하는 롯데카드
롯데카드는 국내 카드사 최초로 해외 BNPL 서비스 출시에 나섰다. 젊은 인구와 낮은 신용카드 이용률, 높은 스마트폰 보급률과 폭증하는 전자 결제 시장으로 BNPL 성장 잠재력이 큰 베트남이 대상이다. 롯데카드의 베트남 현지 법인인 '롯데파이낸스 베트남'은 지난 24일 '베트남 이커머스 기업 티키와 BNPL 서비스 출시를 위한 제휴를 맺었다. 티키는 2000만명 넘는 가입자를 보유한 베트남 대표 이커머스 업체다. 양사는 올해 안에 티키에서 쓸 수 있는 BNPL 서비스를 내놓을 계획이다.롯데카드의 BNPL이 출시되면 티키 소비자는 앱이나 홈페이지를 통해 간단한 실시간 심사를 거쳐 신용 한도를 받아 바로 후불 결제로 물품을 구매할 수 있게 된다. 무이자 또는 저금리로 2~3개월 동안 대금을 나눠 내는 할부 결제도 지원한다. 소비자는 한 번만 신청하면 연회비 없이 최대 3년까지 서비스 이용이 가능할 전망이다.
롯데카드 관계자는 "베트남은 디지털 결제에 익숙한 MZ세대가 전체 인구의 47.2%에 달할 만큼 젊은 시장"이라며 "소비의 주류로 자리잡은 MZ세대 사이에 BNPL 서비스에 대한 수요가 높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글로벌 시장조사기관 리서치앤마켓에 따르면 베트남 BNPL 시장은 향후 5년간 매년 평균 45%씩 성장, 오는 2028년엔 거래 규모가 13조2000억원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BNPL의 명과 암
전 세계적인 인플레이션으로 물가가 무섭게 오르는 와중에 BNPL은 소비자가 한 번에 내야 할 비용 부담을 줄이면서 원하는 소비를 간편하게 할 수 있는 수단이 됐다. 하지만 그만큼 젊은 층의 과소비를 부추기고 부채의 소용돌이를 심화시킬 수 있다는 비판도 나오고 있다. 미국 시장조사업체 C+R리서치 조사에 따르면 BNPL 이용자의 59%는 "BNPL이 아니었으면 하지 못했을 불필요한 소비를 한 적이 있다"고 했고, 56%는 "결제 시기를 맞추지 못하고 연체한 적이 있다"고 했다.소비자의 신용을 까다롭게 평가하지 않는다는 점은 BNPL 시장이 급성장한 비결인 동시에 가장 큰 취약점이다. 금리가 급등하고 경기 침체의 경고음이 커지는 상황에서 BNPL 소비자들의 연체는 빠르게 늘고 있다. 어펌의 경우 30일 이상 연체금액 비율이 올 1분기 3.7%로 1년 전(1.4%)보다 급등했다.
2020년부터 일부 소비자에게 BNPL 서비스 '나중결제'를 지원해온 쿠팡도 오는 10월부터 분납 후불 결제를 중단하기로 했다. 쿠팡은 그동안 직매입 상품에 한해 1~3개월까지 무이자로 분납 후불 결제를 제공했지만, 과소비와 연체를 유발하고 '현금깡'에 악용된다는 지적까지 나오자 결국 중단을 결정했다. 각국 감독당국은 BNPL에 대한 규제 마련에 나섰다. 미국 소비자금융보호국(CFPB)는 BNPL 업체들의 리스크 조사에 나섰고 영국 금융감독청(FCA)와 재무부는 업계와 규제방안을 논의하고 있다.
빈난새 기자 binther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