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의 서울' 다채롭게 물들인 3色 여름 클래식 음악축제 [송태형의 현장노트]

송태형 문화선임기자
피아니스트 임주희가 지난 29일 롯데콘서트홀에서 레라 아우어바흐의 '메멘토 모리'를 연주하고 있다. / 두나이스 제공
지난 29일 서울 잠실 롯데콘서트홀. 무대 중앙에 덩그러니 놓인 그랜드 피아노 앞에 붉은 드레스를 입은 임주희(22)가 앉았다. 첫 연주곡은 러시아 출신 여성 작곡가 레라 아우어바흐(49)의 ‘메멘토 모리’. 10년 전 런던 심포니의 내한 공연에서 깜짝 협연자로 등장해 ‘천재 소녀’로 이름을 알린 그가 ‘콘서트 피아니스트’로서 처음 연주하는 여성 작곡가의 작품이었다.

임주희는 다소 거칠게까지 느껴지는 힘찬 타건(打鍵)으로 공연장의 잔향과 피아노의 울림을 그대로 살리며 연주했다. 12분 남짓한 곡에 많은 서사를 담았다. 엄숙한 진혼곡으로 시작해 희비가 교차하는 어린 시절의 추억과 성년기의 분주한 삶을 묘사하다가 ‘죽음을 기억하라(메멘토 모리)’는 메시지를 강렬하게 던졌다. 마지막 음이 여리게 울린 뒤 약 30초의 정적이 흘렀다. 연주의 여운을 음미하는 듯 미동도 없던 임주희가 건반을 살짝 건드리자 그제야 객석에서 박수가 터져 나왔다.

◆뚜렷한 색깔 지닌 '젊은 음악제'

이날 독주회는 세종솔로이스츠가 주관하는 ‘힉엣눙크’ 페스티벌’(8월 16일~9월 6일)의 일곱 번째 프로그램이었다. 지난해에 이어 서울에서 두 번째로 열린 이 페스티벌은 라틴어로 ‘지금, 여기’를 의미하는 축제명에 맞게 모든 공연 프로그램에 현역 작곡가의 작품을 포함하는 게 특징이다. 임주희는 이번 축제의 상임음악가인 아우어바흐의 작품 중 ‘메멘토 모리’를 골랐다. 그는 “이 작품에서 ‘현실을 돌아보라’는 의미를 발견했다”며 “무거운 주제지만 어둠을 뚫고 나오는 한 줄기 빛과 같은 음악을 청중과 함께 나누고 싶었다”고 했다.
소프라노 황수미가 지난 21일 롯데콘서트홀에서 코른골트의 가곡을 부르고 있다. /롯데문화재단 제공
21일 소프라노 황수미(36)가 피아니스트 헬무트 도이치와 함께 롯데콘서트홀 무대에 섰다. 롯데문화재단이 주최하는 ‘클래식 레볼루션’(12~20일)의 대미를 장식한 공연이다. 올해 3회째를 맞은 이 음악제는 매년 특정 작곡가의 음악세계를 깊이 조명한다. 올해는 멘델스존과 코른골트. 황수미도 두 작곡가의 가곡만으로 프로그램을 짰다. 대학원 졸업 리사이틀에서 불러본 멘델스존의 두 곡(‘달’, ‘새로운 사랑’)을 빼고는 이번 공연을 통해 처음 접한 곡들이라고 했다. 하이라이트는 2부 후반부에 부른 코른골트의 ‘어릿광대의 노래’. 황수미는 작품 속 어릿광대에게 빙의라도 한 듯 풍부한 표정, 몸짓과 함께 열창해 객석을 사로잡았다.

이번 음악제에서는 17일 한경아르떼필하모닉이 연주한 ‘킹스 로우’‘바다 매’ 등 영화음악 모음곡을 비롯해 코른골트의 여러 작품들이 국내 초연됐다. 황수미가 “이번 공연을 준비하며 코른골트 가곡에 푹 빠졌다”고 했듯이 연주자뿐 아니라 청중에게도 조금은 낯선 작곡가의 개성과 매력을 발견하는 시간이었다.

◆참신한 선곡·열정 연주 돋보여

24~28일 ‘예술의전당 여름음악축제’가 열린 서울 예술의전당 음악당은 젊은 연주자들이 뿜어내는 에너지로 가득했다. 유럽과 미국 등에서 활동하는 한국인 연주자들로 구성된 페스티벌 오케스트라는 개·폐막 공연에서 차이콥스키의 교향곡 5번(24일)과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교향시 ‘돈 후안’, 라벨의 발레음악 ‘다프니스와 클로에’ 모음곡 2번(28일) 등을 열정적으로 들려줬다. 축제를 위해 만들어져 오랜 기간 손발을 맞추지 못한 프로젝트 악단의 한계가 때때로 총주와 앙상블에서 노출됐지만, 각 파트를 맡은 연주자들의 뛰어난 기량을 확인하기에는 충분했다.
지휘자 김유원과 SAC 페스티벌 오케스트라가 지난 24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차이콥스키 교향곡 5번을 연주하고 있다. /예술의전당 제공
올해 2회째인 이 축제에 참여한 16개 연주팀과 솔리스트 등은 모두 공모를 통해 선발됐다. 28 대 1의 경쟁률을 뚫고 개·폐막 공연을 지휘한 김유원(34)은 “기존 음악축제가 기성 연주자를 섭외하는 데 비해 예술의전당은 신진 음악가들에게 공모를 통해 큰 무대에 설 기회를 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했다.

‘8월은 클래식 공연의 비수기’라는 말이 무색해졌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서울에 등장한 ‘젊은 축제’들이 저마다 뚜렷한 색깔과 비전을 지닌 프로그램으로 주요 공연장을 더없이 풍요롭게 했다. 다채롭고 참신한 레퍼토리로 연주자에게는 새로운 도전의 기회를 주고, 청중에게는 음악 감상의 폭을 넓힐 수 있는 장을 제공했다. 내년 8월에는 어떤 프로그램과 출연진을 선보일까.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송태형 문화선임기자 toughlb@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