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수첩] '웰빙판사' 비판만으로는 풀 수 없는 재판 지연

한국 법관이 맡는 사건 일본 3배
적정 법관 수부터 따지는 게 순서

오현아 사회부 기자
“(판사의 오후 6시 퇴근은) 우리 때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공직자로서 자신을 되돌아봐야 하지 않나 생각한다.”

오석준 대법관 후보자가 지난 29일 국회 청문회에서 한 말이다. 박형수 국민의힘 의원이 이날 “판사들의 ‘워라밸 챙기기’가 재판 지연을 불러일으키는 것 아니냐”며 오 후보자에게 의견을 묻자 이런 답을 내놨다.오 후보자는 박 의원이 ‘고등법원 부장판사 승진제’ 폐지 역시 재판 지연을 불러일으킨 게 아니냐고 묻자 “부작용을 부인할 순 없다”고 했다. 과거엔 고등법원 부장판사로 승진하기 위해 무죄율, 상소 비율, 파기 건수, 사건처리율 등을 복합적으로 챙겨야 했으나, 이제는 승진제가 사라져 ‘열심히 일할 동기’가 사라졌다는 지적이다.

판결이 이전보다 늦어졌다는 건 딱히 틀리지 않은 지적이다. 최근 5년간 전국 법원에서 1심 판결까지 2년 넘게 걸리는 ‘장기 미제’ 사건이 민사소송은 약 3배로, 형사소송은 약 2배로 증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가지 빠진 게 있다. 전체 법관들의 ‘수’다. 고품질, 초고속 판결을 기대할 만큼 법관 수가 적정하냐다. 한국은 법관 한 명이 1년간 맡는 사건이 464건이다. 독일의 5배, 이웃나라 일본의 3배다. 사법정책연구원에 따르면 법관의 절반이 주 52시간 이상 근무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일각에서는 주 52시간제를 지키는 판사를 ‘웰빙판사’라며 조롱한다. 웰빙이 아니라 이제 살 만한 근로 환경이 갖춰졌을 뿐이라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2015년에는 30대의 젊은 판사가, 2018년과 2020년에는 부장판사가 잇달아 과로사로 세상을 떠나기도 했다.

우선순위는 법관 증원이다. 그런 의미에서 김명수 대법원장이 도입한 제도 중 먼저 손봐야 할 것은 ‘법조 일원화’라는 지적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변호사·검사 등 10년 이상 경력자만 판사로 뽑겠다는 법조 일원화 제도 영향으로 앞으로 판사 수가 더 줄어들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10년차 검사나 변호사가 판사로 진로를 바꾸는 일이 쉽지 않다는 것이다. 법조계에서는 “판사 임용을 위해 필요한 법조 경력 연수를 5년으로 낮추는 등의 유인책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지만 어떠한 변화도 일어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이날 청문회에서 법관 부족 문제는 언급조차 되지 않았다. 단순히 ‘워라밸을 챙기는 판사가 재판 지연을 일으키는데, 이런 문화가 바람직하냐’는, 까다로운 ‘도덕적’ 문제로 귀결돼 씁쓸함을 남겼다. 시스템을 빼놓고 신세대의 세태와 직업윤리 탓으로 문제를 돌리면 해법은 요원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