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공정거래법상 동일인 지정제도 폐지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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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A31
"기업 총수 친인척 관리 어려워공정거래법상 대규모기업집단의 ‘동일인’이라는 것이 있다. 이 동일인이 정확히 누구를 의미하는 것인지 어디에도 정의돼 있지 않지만, 대기업그룹 총수를 일컫는 것으로 이해된다. 대규모기업집단 및 동일인 지정 제도는 1986년 공정거래법에 도입됐고, 1987년 32개에 불과하던 대기업집단은 2022년 76개로 늘었다. 그동안 급속한 경제 발전과 적극적 인수합병(M&A)이 이뤄졌고 포스코나 에쓰오일처럼 국내에 동일인의 친족 관계가 없는 기업집단, 외국인이 동일인인 기업집단이 등장하는 등 경영 환경이 크게 달라졌는데, 규제의 큰 틀은 거의 변화 없이 유지되고 있다. 경제 규모 확대에 따라 자산 규모 10조원을 기준으로 ‘상호출자제한기업집단’을 지정하면서도 과거 5조원 규모의 기업집단은 다시 ‘공시대상기업집단’이라는 이름으로 규제를 이어가고 있다.
법적 책임·처벌 기준도 '과잉'
제도 없애 국가 횡포 중단하길"
최준선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
공정거래위원회는 매년 각 기업그룹에 자료 제출을 요구하고, 제출한 자료를 바탕으로 그룹 상위 기업 몇 개의 주식 소유 상황 등을 분석해 대규모기업집단 및 동일인을 지정한다. ‘동일인’ 외에 ‘동일인 관련자’라는 개념도 동원한다. 현재 공정거래법 시행령 개정안이 입법예고 중인데 시행령상 동일인의 친족, 계열회사, 사용인 등이 동일인 관련자에 포함된다. 구체적으로는 동일인의 배우자, 6촌 이내의 혈족 및 4촌 이내의 인척(개정안에서는 4촌 이내의 혈족 및 3촌 이내의 인척과 자녀 있는 사실혼의 배우자 포함), 회사 임원 및 이들이 지배(30% 이상 지분 소유)하는 기업도 포함돼 누구도 동일인 관련자의 범위를 정확히 파악하기 어렵다.제도의 목적은 동일인과 동일인 관련자가 이해를 같이해 기업을 지배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한 것이다. 대규모기업집단의 역사가 길어지고 기업 승계가 대를 넘어가면서 지배관계가 희석되는 상황에서 이들이 함께 기업을 지배한다는 가정은 참 억지스럽다. 동일인 관련자 중 대부분은 동일인과 경제적 생활 공동체도 아닐뿐더러 때로는 왕래도 없고 얼굴도 모르며 서로 원수처럼 지내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도 공정위는 아무 조사 권한이 없는 ‘동일인’에게 본인 및 동일인 관련자의 주식 소유 상황 등 지정자료 제출 의무를 지우고, 미제출·허위사실 제출 시 그를 ‘형사처벌’ 하는 방식으로 운영한다.
동일인으로서는 동일인 관련자 자료의 진실성을 ‘검증’하기도 어렵다. 동일인 관련자가 프라이버시를 이유로 자료 제공 요청을 거부할 수도 있다. 필요하면 공정위가 조사해야지, ‘고발 지침’까지 만들어(2020년 제정) 아무 권한 없는 동일인에게 자신에게 불리할 수 있는 자료를 정확히 제출하라고 의무화하면서 그에 따른 모든 법적 책임을 지우는 것은 국민에 대한 국가의 횡포 외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동일인 및 동일인 관련자 중 누구에게 고의·과실이 있는지를 묻지 않고 동일인을 처벌하게 돼 있는 것은 명백히 헌법상 자기책임원칙 위반이며 현대판 연좌제다. 또한 지정자료 미제출 또는 허위 제출에 정당한 이유가 없는 한 처벌 대상으로 규정함으로써, 동일인이 ‘정당한 이유’를 주장·증명하도록 증명책임을 전환하고 있다. 국민에게 금지의무를 부과하면서 금지하는 내용을 포괄적으로 규정하고, 불이익 처분을 받을 수 있는 자에게 그 ‘정당한 이유’가 있었음을 역으로 증명하라고 하는 것은 헌법상 ‘명확성 원칙’ 위반의 전형적 사례다. 이것은 행정편의주의, 즉 공무원 편하자고 기업 총수를 때리는 것이다. 과태료에 처하면 충분할 질서위반에 대해 형사처벌을 가하는 것은 헌법상 ‘과잉금지원칙’ 위반이다.
날이 갈수록 한국의 법치주의는 성숙해 가는 것이 아니라 악화하고 있다. 공정위가 입법예고한 시행령 개정안의 내용도 기업들의 기대에 훨씬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동일인 제도, 나아가 대규모기업집단 지정 제도를 폐기하는 등 보다 근본적 개혁이 필요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