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가 클래식 음악?[김희경의 영화로운 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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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인원이 동물의 뼈 무덤을 발견합니다. 이를 한참 동안 바라보더니, 굵은 뼈다귀를 하나 골라 손에 듭니다. 처음엔 조심스레 휘두르지만 갈수록 동작이 커집니다. 그리고 이 뼈다귀로 뼈 무덤을 내리치며 포효하죠. 점점 정확한 각도로 힘을 실어 내리치고, 뼈들은 산산조각이 납니다. 뼈다귀를 이용해 다른 것을 부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거죠. 유인원이 도구의 사용법을 깨달은 순간입니다. 그러더니 여러 마리가 모여 각자 뼈다귀를 들고 싸움을 벌입니다. 서로 전쟁을 하는 인간들의 모습이 연상됩니다. 그리고 한 유인원이 뼈다귀를 허공으로 내던지는 순간, 돌연 길쭉한 우주선으로 화면이 전환됩니다.
1968년 미국에서 최초로 개봉한 우주 SF 영화 '2001년 스페이스 오디세이'에 나오는 한 장면입니다. '샤이닝' '아이즈 와이드 셧' 등을 만든 미국 출신의 거장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대표작이죠. 아서 클라크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이 작품은 영화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걸작으로 꼽힙니다. 특히 이 장면이 유명한데요. 인류가 진화를 거쳐 마침내 우주까지 도달한 것을 압축적으로 담았습니다. 장대한 인류사를 이토록 강렬하고 효과적으로 표현하다니 놀랍습니다. 이 장면에 나온 배경 음악도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사랑하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란 곡입니다. 독일 출신의 음악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1864~1949)가 만든 교향시입니다.
교향곡(Symphony)은 보통 4악장으로 구성돼 있는데요. 교향시는 한 악장으로만 이뤄져 있습니다. 하지만 그 짧은 선율 안에도 서사적 특징이 두드러집니다. 교향시(Symphony Poem)이란 용어 자체가 ‘교향적(symphonic)’이란 단어와 ‘시(poem)’란 단어가 결합된 겁니다.
이 음악은 어둠을 상징하는 오르간의 낮은 음과 더블베이스의 트레몰로(떨리는 듯 음을 빠르게 되풀이하며 연주하는 기법)로 시작됩니다. 그러다 트럼펫, 팀파니 등의 연주로 이어지는데요. 마침내 해가 떠오르고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것만 같은 짜릿함을 선사합니다. 이 곡을 듣고 있는 내내 가슴이 웅장해지는 느낌도 받습니다. 그런데 곡 제목이 왠지 익숙하지 않으신가요. 프리드리히 니체의 대표 저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음악으로 재탄생 시킨 겁니다. 많은 사람들이 음악 제목보다는 이 철학 책 제목으로 더 잘 알고 있죠. 철학을 음악으로 표현했다니 낯설면서도 신기합니다. 슈트라우스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작곡한 건 불과 32살이었습니다. 젊은 나이에 관록 있는 대가처럼 뛰어난 명작을 만들어낸거죠.
그는 어렸을 때부터 천재적인 면모를 보였습니다. 뮌헨 궁정 교향악단의 호른 수석이었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일찌감치 음악에 소질을 보였죠. 6살에 이미 작곡을 할 정도였습니다. 그는 한 장르에 국한되지 않고 교향곡, 협주곡, 가곡, 오페라 등 다양한 장르를 섭렵한 인물로도 유명합니다. 문학을 즐겨 읽고 그 감동을 고스란히 담아 작곡하기도 했습니다. <돈키호테> <맥베스> <돈 후안> 등을 모두 음악으로 만들었죠.
방대한 양의 서사를 음악으로 표현하다니 놀라운데요. 그는 "나는 한 자루의 빗자루도 음악으로 완벽하게 묘사할 수 있다"라며 자신감을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슈트라우스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가 처음 나왔을 때엔 큰 논란이 일었습니다. 호평이 나온 반면 비난도 쏟아졌습니다. '철학의 음악화'라는 파격적인 시도에 대해 의견이 분분했던 거죠.
슈트라우스는 논란이 일자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결코 위대한 철학자 니체의 작품을 음악으로 표현하려 한 것이 아니다. 인류가 그 기원에서부터 여러 단계를 거쳐 발전해가는 모습을 음악이라는 수단으로 표현하려 했다."
큐브릭 감독은 슈트라우스의 이런 의도를 정확히 파악했던 것 같습니다. 원래는 영화 속 유인원 장면에 들어가려던 음악은 이 곡이 아니었습니다. 음악 감독인 알렉스 노스가 만든 다른 음악이 쓰일 예정이었습니다. 하지만 큐브릭 감독이 그 곡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슈트라우스의 곡이 제격이라 판단했죠.
큐브릭 감독은 결국 안정적인 선택 대신 과감한 도전을 하기로 했습니다. 노스 몰래 슈트라우스의 곡으로 바꿔 편집을 했죠. 많은 논란이 있을 것이라 예상했지만 작품을 위해 위험을 감수하기로 한 겁니다. 노스는 시사회에서야 사실을 알고 크게 실망했습니다. 하지만 관객들은 이미 이 곡에 크게 감동한 상태였죠. 장르를 불문하고 오랜 사랑을 받는 명작들엔 공통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많은 논란이 예상되거나 이미 일어나고 있는 상황에서도 자신의 선택을 믿고 돌파하는 것, 즉 예술가의 직관과 용기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타인의 시선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시선을 과도하게 의식하다 보면 자신이 가고자 하는 길은 제대로 가지 못한 채, 그들로부터 쏟아지는 수많은 말들에 휘둘리게 됩니다. 때론 온갖 비아냥과 조롱에 흔들리며 좌절하기도 하죠. 이젠 그 말들을 가볍게 떨쳐버리는 게 어떨까요. 그리고 스스로의 선택을 믿고 따르며 여러분만의 명작을 만들어 가시길 바라겠습니다.
김희경 기자 hk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