땀·눈물이 빚어낸 아름다운 '더 발레리나' [송태형의 현장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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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니버설발레단·문예회관 5곳 제작공연장에 들어서자 발레 스튜디오로 꾸며진 무대가 눈에 띕니다. 공연 시작 약 10분 전부터 무용수들이 들어와 바에 다리를 올리고 몸을 풀거나, 이런저런 기본 동작을 연습합니다. 시작부터 새롭습니다. 사전 정보 없이 단순히 ‘발레 공연’를 생각하고 온 관객은 ‘이게 뭐지’ 할 듯싶었습니다. 지난 4일 경기 고양아람누리 아람극장 무대에 오른 유니버설발레단의 신작 ‘더 발레리나’ 공연 현장입니다.
'백스테이지 드라마' 형식의 발레극
예술과 무대 향한 무용수 열정 표현
공연 전부터 막을 열어 놓고, 배우들이 미리 등장해 무언가 하다가 자연스럽게 극을 시작하는 것은 연극 무대에선 자주 볼 수 있는 기법입니다. 극의 시작과 끝을 꽉 닫아놓는 게 아니라 어떤 이야기나 행위가 이전부터 시작해 이후에도 계속된다는 것을 은근히 알려주는 수법이기도 합니다. 이 작품의 주제 중 하나인 ‘발레 무용수들의 끊임없는 노력과 끝없이 반복하는 연습’과 맞아떨어지기도 합니다.이런 공연 형태를 뭐라 불러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뼈대는 연극입니다. 발레 공연으론 이례적으로 대사가 등장합니다. 무대에서 무용수가 소리를 내거나 독백을 하는 게 아니라, 극 중 발레 마스터 한 명에 한정된 얘기이긴 하지만 아예 연극처럼 연기를 하며 대사를 상당히 길게 하는 공연을 저는 처음 봤습니다.공연은 한 발레단이 네오클래식(신고전) 발레 갈라 공연을 올리기 하루 전 연습실부터 공연이 끝난 다음날 연습실에 다시 모이는 것으로 끝납니다. 중간에 기본적으로 허구인 이 극에서 올리려는 발레 갈라 공연이 사실적으로 펼쳐집니다.
백스테이지를 다룬 뮤지컬이나 영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플롯입니다. 뮤지컬 ‘브로드웨이 42번가’를 봤다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구조입니다. 다만 중간의 공연이 훨씬 사실적이고 비중이 높죠. 그렇다고 발레를 다룬 본격적인 연극이라고 보기에는 스토리나 플롯이 지나치게 단순하고 느슨합니다. ‘주역이 다쳐 무산될 뻔한 공연을 재능있고 꾸준히 노력해온 신인이 대신해 구한다’는 판에 박힌 설정이 어설프게 전개됩니다.하지만 이런 약한 드라마성이 공연에 그리 약점이 되지는 않습니다. 연극의 형태를 띠며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넘나드는 이 공연이 방점을 두는 것은 현실입니다. 드라마는 현실을 보다 재미있고, 편안하게 즐길 수 있게 하는 역할을 톡톡히 해냅니다.공연은 쇼팽의 독일 민요 ‘스위스 목동’에 의한 변주곡이 흐르고, 발레 마스터가 등장해 본격적인 클래스에 돌입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발레 마스터 홀로 말을 하면서 진행하는 클래스가 상당히 사실적으로 느껴졌습니다. 발레 기본 동작부터 군무, 6인무, 주역들의 파드되까지 중간중간 마스터가 개입해 잘못된 것을 지적하고 다시 근사하게 해내는 장면들이 쇼팽의 배경음악과 절묘하게 어우러집니다. 객석에는 인근 고양예고 발레 전공 학생들이 눈에 많이 띄었는데 발레 지망생들뿐 아니라 발레 공연 입문자나 애호가들도 흥미롭게 지켜봤을 듯합니다. 많은 공부가 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아 저게 피루에뜨’, ‘아 저게 푸에테’, ‘이탈리안 푸에테는 저렇게 하는 거구나’ 하고 말이죠.
“끊어지지 않게 끊어지지 않게 모짜렐라 치즈처럼 쭉쭉 늘리면서~” “왼쪽에 있는 사람이 앞으로 지나가는 거 아직도 몰라요? 이건 기본이에요.” “우리 발레단 자랑 칼군무라는 얘기 많이 들었죠? 줄 맞추는데, 앞뒤 좌우 옆 사이 좀 더 신경쓰세요” 등 마스터의 말들이 재미있습니다. 아마도 실제 연습 현장에서 나왔을 법한 말들입니다. “우리 발레단 자랑 칼군무~” 할 때는 살짝 웃음이 나왔습니다. ‘그러지 않아도 극 중 발레단이 어느 발레단을 모델로 하는지 다 알 텐데 이렇게 극중 대사로 다시 발레단 자랑을 하는구나’ 하는 생각에 말이죠. 이런 사실적인 대사들의 재미도 쏠쏠합니다.본격적인 공연에 넘어가기에 앞서 무대를 전환하는 시간 동안 공연장을 향하는 여러 관객의 대화 장면과 사막(반투명막)을 깔고 보여주는 무대 뒤 분장실과 대기실 모습이 나옵니다. 대화는 작위적인 느낌이 쏠쏠 풍기는데 그게 오히려 재미를 줍니다.드디어 중간 발레 갈라 공연입니다. 유니버설 발레단의 실제 공연에 으레 등장하는 문훈숙 단장의 해설이 시작됩니다. 굳이 따지자면 문 단장은 극 중 발레 공연의 해설자로 나오는 셈인데요. 이젠 현실과 허구의 경계가 의미 없다고 봐야겠습니다. 그동안 여러 공연장에서 문 단장의 해설을 들어봤지만 신고전 발레 강의는 처음입니다. 고전발레와 신고전발레의 차이를 직접 시연하면서 얼마나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는지 눈에, 귀에 쏙쏙 들어왔습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몸을 사리지 않는 열연을 보여줬습니다.
‘맥도웰의 피아노 협주곡 2인무’ ‘라흐마니노프의 파가니니 랩소디’ ‘쇼팽의 피아노 스케르초 2인무’ ‘미리내길’ ‘비연’ 등 다섯 편의 ‘신고전 발레’ 작품이 연속해서 펼쳐졌습니다. 연극이 아니라 수준 높은 발레를 보러온 관객의 기대를 충족시킬 만한 호연이었습니다. ‘더 발레리나’ 전체를 안무하고 연출한 유병헌 유니버설발레단 예술감독의 기존 발표작들이라고 했습니다. 문 단장의 해설대로 발레에는 ‘백조의 호수’ 같은 고전발레, ‘지젤’ 같은 낭만 발레만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발레의 아름다운 선이 현대무용의 자유로운 표현과 한국무용의 우아하고 정제된 곡선과 만나 어떻게 신고전의 새로운 아름다움을 빚어낼 수 있는지를 보여주기에 충분한 무대였습니다.갈라 중 앞의 세 작품이 펼쳐질 때는 무대 한 편에서 백스테이지 풍경을 보여줍니다. 무대에선 활짝 웃으며 팔짝팔짝 뛰며 달리던 무용수들이 백스테이지에 들어서자마자 쓰러지며 숨을 헐떡입니다. 연습실부터 백스테이지까지 무대 뒤편이 궁금한 관객의 호기심을 충족시켜 줍니다.
공연은 다시 연습실로 돌아와 끝이 납니다. 이 발레단의 대표 공연 중 하나인 ‘호두까기 인형’을 올해는 50회나 한다는 단원들의 푸념이 결국은 교훈적인 다짐으로 끝나는 대사도 재미납니다. ‘이렇게도 재치 있게 홍보할 수 있구나’ 싶었습니다.
물론 한 공연이 올려지기까지의 ‘애환’을 극적으로 다루는 백스테이지 드라마에 비해 슬픈 ‘애(哀)’는 거의 드러나지 않고, 전반적으로 사실보다 조금은 미화한 느낌이 듭니다. 드라마만 따지면 전반부에 주역 대신 ‘대타’가 된 신입이 후반부 갈라 공연 중 한 편에는 출연하는 게 맞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하지만 이런 드라마적인 한계에도 불구하고 발레의 백스테이지 세계와 예술과 무대를 향한 무용수들의 열정과 애환, 노력을 꽤나 흥미롭고 감동적으로 드러냈습니다. 발레를 잘 모르는 분들도 재미있게 배우면서 즐길 수 있는 공연입니다.이 작품은 ‘문예회관과 함께하는 방방곡곡 문화공감 사업’에 선정돼 유니버설발레단과 지역 문예회관 다섯 곳이 함께 제작했습니다. 하남문화예술회관과 군포문화예술회관, 고양아람누리 아람극장에 이어 오는 16일과 17일 경북 영덕군 예주문화예술회관과 23일과 24일 경남 진주시 경남문화예술회관에서 공연합니다.
송태형 문화선임기자 toughlb@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