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여왕 관 보고 눈물 왈칵…"새벽부터 10시간 줄 서 조문"

로열마일 따라 장례행렬, 성 자일스 대성당에 안치 후 첫 일반인 조문
운구 행렬에 추모객 운집…정작 스코틀랜드 주민들은 '미지근'
12일(현지시간) 스코틀랜드 에든버러 성 자일스 대성당에 안치된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관을 보고 나오는 추모객들은 눈시울이 젖어 있었다.어떤 느낌이냐고 묻자 감정을 가라앉히느라 숨을 골랐고 눈물을 왈칵 쏟느라 대답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이도 있었다.

이들은 성당 안이 엄숙하고 고요하며 아름다웠다고 입을 모았다.

에든버러 인근 지역에서 친구와 함께 왔다는 베티 씨는 성당에서 100m쯤 걸어나온 후에도 목소리가 떨렸다.그는 "관 위에 스코틀랜드 왕기, 왕관, 화환이 놓여있었고 관을 지키는 군인이 교대하는 동안 기도 소리가 들렸다"며 "여왕의 마지막에 어울리는 분위기였다"고 말했다.

에든버러에서 20년 살았다는 미국인 남성 윌리엄 씨는 눈물을 닦으며 "감동적이었고 존경하는 마음이 절로 솟았다"며 "사진 촬영 등은 금지됐고 관 앞에 멈추지 않고 계속 움직여야 했다"고 전했다.
여왕의 관은 이날 오후 5시30분부터 처음 대중에 공개됐다.그렇지만 조문객은 새벽부터 늘어섰다.

전직 군인 부부인 데버라씨와 남편은 딸과 함께 이날 오전 9시께 줄을 서 약 10시간 뒤인 6시 반이 돼서야 성 자일스 대성당에서 나왔다.

그는 "군인으로서 여왕에게 마지막 경의를 표했다"고 말했다.그는 왼쪽 가슴에 키프로스와 이라크 복무 후 받은 훈장을 달았는데 여기엔 여왕의 얼굴이 새겨져 있었다.

스코틀랜드 당국은 혼잡을 피하려고 성 자일스 성당에서 걸어서 15분 정도 거리에 있는 메도우스 공원에 줄을 서도록 했다.

또 성 자일스 성당에 들어가기 전 '공항 수준'의 소지품 검사가 이뤄졌다.

큰 가방은 성당 안으로 들고갈 수 없었고 휴대전화 촬영도 엄격히 금지됐다.
줄 맨 앞에서 선 전직 군인 조지 히긴스(61) 씨는 이날 오전 6시45분에 메도우스 공원에 왔다고 했다.

에든버러대에서 보안요원으로 일하는 그는 군 최고 통수권자였던 여왕의 마지막 길에 예를 표하려고 서둘렀다고 말했다.

10시간을 기다려 조문을 마친 히긴스 씨는 "내가 사는 에든버러에서 여왕이 서거하셔서 직접 조문할 수 있는 특권을 갖게 됐다"며 "나의 옛 상관을 조문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라고 말했다.

메도우스 공원의 줄은 오전 10시 반쯤에 이미 100m가 훌쩍 넘었다.

이들은 줄 서는 데 익숙한 영국인답게 관이 대중에 공개된 오후 5시께까지 화장실만 급히 다녀오면서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조문객의 줄은 이날 밤늦게까지 이어졌다.
일반인 조문에 앞서 여왕의 시신은 훌리루드 궁전에서 성자일스 성당까지 이어진 로열마일 도로를 따라 운구됐다.

국왕 찰스 3세와 운구 행렬을 보려는 추모객이 로열마일 양옆에 쳐진 철제 울타리 뒤에 빽빽이 운집했다.

오전 10시쯤엔 의자와 돗자리를 챙겨온 추모객이 한 줄로 앉아 있었는데 낮 12시 반쯤엔 줄이 5겹이 됐고 2시반 장례 행렬 출발을 알리는 포 소리가 들릴 무렵엔 10여겹으로 불어 보도가 꽉 찼다.

수천명이 긴 시간 기다리는데도 소란스럽지 않았으며 여왕의 관이 등장하자 약간의 소음마저 사라져 적막이 감돌고 숙연해졌다.

운구차 뒤에는 여왕의 네 자녀가 걸어서 따랐고 이어 커밀라 왕비 등이 차로 이동했다.

간혹 박수를 치거나 '하느님 국왕을 지켜주소서'(God Save the King)라고 외치는 사람도 있었다.

국기 유니언잭을 흔드는 모습도 보였다.

운구 행렬이 지나가자 주변에선 새 국왕 찰스 3세의 모습이 잘 찍혔는지 확인하고 서로 사진과 영상을 공유했다.
영국 각지는 물론 미국, 캐나다 등 세계에서 온 추모객이 여왕의 일화를 나누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다이애나비의 비극적 죽음을 기억하기도 했고, 찰스 3세 국왕의 외도 상대였던 커밀라 왕비를 용서하지 못할 줄 알았는데 시간이 지나니 받아들이게 됐다고 털어놓는 얘기도 들을 수 있었다.

영국 왕실의 화려한 모습이 좋다면서도 최근 어려운 경제 상황에 불만을 내비치는 사람도 있었다.

브렉시트에 찬성했지만 이제는 코로나19와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상황이 달라져서 뭐가 좋은지 잘 모르겠다는 비판도 나왔다.

로열마일에서는 잉글랜드 다양한 지역에서 온 추모객들을 만났는데 에든버러를 제외하면 정작 스코틀랜드의 다른 지역에서 온 사람은 드물게 보였다.

스코틀랜드 출신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이 가운데는 군인 가족이 유독 많았다.

런던 곳곳에 여왕 사진이 걸린 것과 달리 에든버러에선 여왕의 얼굴을 거의 볼 수 없을 만큼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사이의 온도차가 컸다.
메도우스 공원 옆 푸드트럭에서 일하는 젊은 남성 직원은 "여왕은 좋게 평가하고 모든 죽음은 슬프지만 그렇다고 눈물이 나고 그런 건 아니다"라고 어깨를 으쓱했다.

그는 전날 여왕의 관이 홀리루드 궁전으로 이동하던 중 한 20대 여성이 군주제 폐지를 외치다가 체포된 일을 언급하며 "시위를 하기에 적절한 때와 장소는 아니었지만 이해한다"며 어느 정도 동의한다고 했다.

메도우스 공원에서 줄을 선 캐럴-앤씨는 "에든버러에서 평생 살았고 여왕을 정말 좋아한다"며 여왕이 21세 때 영연방을 위해 평생 헌신하겠다고 약속한 연설 문구를 줄줄 외웠다.

그러면서도 "스코틀랜드 분리 독립을 지지하고 브렉시트는 반대한다"고 말했다.이날 한 20대 남성이 미성년자 성폭행 의혹을 받는 여왕 차남 앤드루 왕자를 향해 비난하는 말을 외쳤다가 경찰에 끌려가기도 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