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수진의 논점과 관점] 통화스와프 못하나, 안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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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진 논설위원지금의 글로벌 외환시장은 흡사 거대한 도박장 같다. 판돈(금리를 올릴 여력)이 있으면 살아남고, 없으면 죽어야 하는 비정한 게임판이다. 미국이 고물가를 잡겠다며 먼저 금리 인상 레이스를 시작했고, 너도나도 ‘콜’을 외치고 있다. 그에 따라 거대한 ‘머니 무브’가 시작됐고, 판돈이 떨어진 나라들부터 쓰러지고 있다. 스리랑카가 지난 4월 외화 유출을 견디다 못해 디폴트(채무불이행)를 선언했고, 파키스탄 방글라데시는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했다. 이집트, 가나 등도 그 뒤를 이을 전망이다.
한국도 물가 급등과 자본 유출에 대응해 금리 인상에 드라이브를 걸고 있다. 그러면서 경상수지, 외환보유액 등 펀더멘털이 좋기 때문에 과거와 같은 위기 상황을 걱정할 필요는 없다는 주장을 잊지 않는다. 그러나 상황은 그렇게 녹록지 않아 보인다.
커지는 외화 유출 위기 우려
환율은 연초보다 16%(달러화 대비), 2021년 초 대비 25%나 올랐다. 앞으로 어디까지 오를지도 가늠하기 어렵다. 게다가 우리 실생활도 고환율·고물가·고금리 복합위기에 아우성이다. 학비 부담에 유학 간 자녀들이 돌아오고 있고, 주식·암호화폐 등 자산시장 붕괴로 1년 전 유행했던 ‘플렉스’ 대신 ‘냉장고 파먹기’ ‘만원의 행복 챌린지’ 등이 포털 검색어 상단에 올랐다. 고금리에 다중채무자 수가 440만 명, 전체 경제활동인구의 15%에 이른다. 기업들은 투자와 고용을 머뭇거리고 있다. 긴축과 구조조정, 퇴사로 점철될 우울한 세밑 풍경이 코앞이다.외환시장 혼란이 위기로 전이되는 것을 막는 방법은 세 가지다. 금리를 아무리 인상해도 끄떡없는 기초 체력을 키우든지, 해외 자금을 빨아들이는 투자 매력국으로 만드는 게 정석(定石)이다. 그러나 이 경로는 시간도 에너지도 많이 든다.
당장은 유사시를 대비한 ‘소방 호스’가 필요해 보인다. 그중 하나가 한·미 통화스와프다. 통화스와프는 일종의 ‘마이너스 통장’이다. 급할 때 달러를 상대국에서 한도 내 끌어다 쓰고 나중에 이자를 붙여 원화로 갚는 구조다. 한·미 통화스와프는 외환시장에서 효과가 보증된 보험이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 위력을 발휘했다. 당시 한국은행과 기획재정부가 서로 통화스와프 체결의 공(功)을 내세우며 얼굴을 붉혔을 정도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이번엔 둘 다 소극적이다. 안 하는 건지, 못하는 건지 알 수 없지만 체결 당사자인 한은 측은 “그럴 가능성도, 필요도 없다”고 잘라 말한다.
선제적 최소 방어막 준비 시급
또 다른 대안으로 떠오른 게 통화협력체계 구축이다. 지난 5월 21일 한·미 정상회담 때 양국은 질서 있고 잘 작동하는 외환시장을 위해 더 긴밀히 협의해 나가겠다고 공동 성명을 발표했다. 통화스와프보다 더 확실한 보험이라는 평가가 나왔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그 후 감감무소식이다.과거 숱한 위기설(說)이 설로 끝난 이유는 철저히 준비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말로만 ‘미증유의 복합경제위기’이고, 대응은 수십 년 전 레코드판 그대로다. ‘펀더멘털은 양호하다’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다’는 얘기뿐이다. 확실한 안전판이 필요해 보인다. 미국에 그 역할을 기대하는 게 무리일까.
한국과 미국은 경제·안보는 물론 기술·가치까지 공유하기로 한 글로벌 포괄적 전략 동맹이다. 그런 차원에서 수십조원의 대미 투자와 인도·태평양 경제프레임워크(IPEF) 참여 등을 약속했던 것이다. 마침 윤석열 대통령이 이번 해외 출장길에 미국 대통령을 만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외환시장 등에서 서로 듣고 싶은 얘기를 주고받는 자리가 되길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