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실 '비누 조각상' 손 씻어 뭉개지는 것도 예술

'화장실 프로젝트2' 나선 신미경

비누로 제작한 그리스 조각·불상
화장실에 설치해 실제 쓰게 한 뒤
뭉툭해진 조각 회수해 다시 전시
"작품 훼손은 안 된다는 상식 깨"

KIAF에 출품한 비누 화병
2000만원 넘는 가격에도 인기

청동·세라믹 등 다른 재료도 써
"한 가지 재료에 갇히지 않을 것"
서울 소공동 롯데백화점 에비뉴엘 2층 화장실에 전시된 신미경 작가의 비누 조각상. 롯데백화점 제공
서울 소공동 롯데백화점 에비뉴엘의 2층 화장실 한쪽엔 미술관에서나 볼 법한 조각상이 놓여 있다. 짙은 쌍꺼풀, 섬세한 옷주름, 풍성한 머리카락까지. 백화점의 럭셔리한 분위기를 돋우는 이 조각상은 신미경 작가(55·사진)가 비누로 만든 작품이다. 엄연한 예술작품이면서도 실제로 사용이 가능한 욕실용품이다. 방문객은 손을 씻을 때 누구나 이용할 수 있다.

신 작가에게는 ‘비누 작가’라는 별명이 따라다닌다. 20년 넘게 비누로 고대 그리스 조각상, 불상, 꽃병 등 다양한 조각 작품을 제작해왔기 때문이다. 그는 해외에서 더 유명하다. 이달 초 ‘세계 3대 아트페어’ 가운데 하나인 프리즈가 서울에서 열렸을 때도 한국을 찾은 해외 미술계 VIP들이 줄을 지어 신 작가의 작업실을 찾았다. 한국국제아트페어(KIAF)에 출품된 1500만~2500만원짜리 비누 작품들도 인기를 끌었다.

누구나 만질 수 있는 비누 조각상

신 작가는 내년에 또 하나의 관객 참여형 프로젝트를 준비하고 있다. 그는 최근 서울 가산동의 작업실에서 기자와 만나 “비누 조각품 150여 점을 제작해 국내에 설치하는 ‘화장실 프로젝트 시즌 2’를 준비 중”이라며 “어떤 작품을 만들고, 어디에 비치할지 구상하는 단계”라고 했다.

2004년 처음 시작한 ‘화장실 프로젝트 시즌 1’은 신 작가가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리게 된 계기가 됐다. 그는 비누로 만든 불상을 영국 전역에 있는 미술관 내 화장실에 비치해 사람들이 사용하게 했다. 수개월이 지나 조각상이 형체를 잃고 뭉툭해지자 신 작가는 이들을 모아 전시회를 열었다. 영국 가디언지는 그의 프로젝트를 두고 “복잡하고 정교한 조각상이 매끄러운 구(球)로 바뀌는 과정은 박물관의 작품을 ‘모더니즘 예술’로 바꾸는 과정”이라고 평가했다.신인 작가 시절 그의 이름을 알린 프로젝트를 중견 작가가 된 지금, 국내에서 대규모로 펼치는 것이다. 이달 1일부터 소공동 롯데백화점 본점과 에비뉴엘에 비치된 비누 조각상은 화장실 프로젝트 시즌 2의 ‘프리뷰’다.

작품을 제작하는 과정은 이렇다. 열에 녹는 특수 비누를 사용해 비눗물을 만들고 미리 제작한 틀에 부어서 굳힌다. 이른바 ‘캐스팅(주조)’이다. 작업 초기에는 열에 녹지 않는 일반 비누를 일일이 강판에 갈아서 가루로 만든 뒤 뜨거운 물에 반죽해 찰흙처럼 빚었지만, 2003년 열에 녹는 비누를 발견하면서 주조 방식을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나는 비누 작가 아닌 조각가”

쓰다 남은 비누 조각상을 왜 다시 전시장에 들여올까. 신 작가는 “비누 조각상을 사용하는 건 ‘유물의 가치’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과정”이라고 했다. 그의 비누 작품은 ‘역사적·종교적 가치를 지닌 유물은 만져서도, 훼손해서도 안 된다’는 상식에서 벗어나 있다. 이들은 사람의 손을 타면서 마모되고, 마치 오랜 시간 풍화된 유물처럼 형체를 잃는다. 애써 만든 조각상이 이렇게 본모습을 잃어가는 과정도 신 작가에게는 예술이다.작업 초기엔 종교단체 등으로부터 항의도 받았다. 불상을 화장실에 배치해 만지게 하는 것이 신성 모독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세계 각국이 신 작가의 독특한 작품과 메시지에 주목하고 있다. 지난해 네덜란드에서 개인전을 연 데 이어 내년엔 미국 필라델피아미술관에서 3m가 넘는 비누 조각상을 만드는 초대형 프로젝트에도 참여할 계획이다.

신 작가는 2015년부터 비누 외에 청동, 세라믹, 제스모나이트 등 여러 재료로 조각을 시도하고 있다. 비누라는 재료에 갇히지 않고, 다양한 조각으로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다는 마음에서다. “예술가가 자신이 계속 해오던 작업만 하는 건 마치 가수가 철 지난 히트곡만 계속 부르는 것과 같아요. 저를 ‘비누 작가’로 한정 짓지 말고, ‘조각가’로 불러줬으면 좋겠습니다.”

이선아 기자 sun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