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엘리자베스 재위 70년의 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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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호 건설부동산부장“그녀의 죽음을 향한 감동적인 애도의 물결에서 교훈을 얻을 수 있다고 믿습니다.”
1997년 9월 영국 왕실은 최악의 궁지에 내몰렸다. 찰스 왕자와 불화를 빚던 다이애나 왕세자빈의 갑작스러운 사망에서 촉발된 국민적 분노는 자칫 왕가를 파멸로 몰아넣을 수 있는 수준이었다. 상상을 초월한 애도 열기에 당황한 영국 왕실은 스코틀랜드 밸모럴성에 은거했다.수일 만에 성에서 나온 여왕은 “이번 사태를 교훈으로 삼겠다”며 애도 열기 속에 숨어 있는 분노 정서를 보듬었다. 장례식에서는 며느리의 운구 차량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수백만의 인파와 전 세계 수억 명이 TV 중계로 이를 지켜봤다. 왕가를 향하던 분노는 한순간에 사그라들었다. 역사 비평가들은 “절제된 행동으로 상황을 반전시키는 여왕의 능력을 보여준 대목”이라고 평가했다.
기민한 소통으로 구심점 역할
엘리자베스 여왕의 서거 소식을 접한 후 수년 전 봤던 6부작 다큐멘터리 ‘윈저이야기:영국 왕실의 비밀’을 다시 정주행했다. 최초로 공개된 왕실기록보관소의 미공개 기록물과 편지를 통해 드러난 왕실의 속살 못지않게 군주제를 지켜내기 위한 윈저가의 몸부림을 조명한 부분이 눈길을 끄는 다큐멘터리다.영국 윈저가는 1917년 새롭게 만들어진 명칭이다. 원래 이름은 독일계인 ‘작센 코부르크 고타’. ‘해가 지지 않는 대영제국’을 완성한 빅토리아 여왕의 독일계 남편인 앨버트 경의 이름에서 시작된 부계 성이다. 하지만 독일과의 1차 세계대전 중 영국 왕실은 전국적 반독 정서로 위기를 맞는다. 다큐멘터리에서는 “독일과 관련이 있다며 심지어 닥스훈트(독일 품종의 개)도 길거리에서 걷어채였다”고 당시 분위기를 전한다.1910년대 유럽을 휩쓴 사회주의 열풍과 군주제 폐지 여론은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1917년 당시 영국 왕 조지 5세(여왕의 할아버지)의 이종사촌인 러시아의 니콜라이 2세는 볼셰비키 혁명으로 퇴위당한 뒤 온 가족이 몰살당했다. 1년 뒤에는 사촌인 독일의 빌헬름 왕가도 1차 세계대전 패전과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를 지켜본 영국 왕실은 독일계 이름과 작위를 모두 폐기하고 영국인에게 친숙한 ‘윈저’를 왕가의 이름으로 택했다.
위기에 국민 경청 지혜 배워야
엘리자베스 여왕은 이런 곡절 끝에 탄생한 윈저가 105년의 역사에서 지난 70년간 56개 영연방을 결속시키고 군주제를 지켜낸 구심점이었다. 윈저가는 두 번의 세계대전과 엘리자베스 여왕 치세를 거치면서 영국의 소프트파워로 변신했다. 이름까지 바꿔가며 시대 변화에 대처한 노력과 국민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여왕의 캐릭터가 어우러진 결과라는 게 전문가들의 평가다. 지난 5월 즉위 70주년 행사인 ‘플래티넘 주빌리’를 맞아 현지에서 한 여론조사에서 군주제 유지 여론이 62%를 차지했다. 연 8630만파운드에 달하는 왕실교부금을 들어 군주제 폐지 목소리도 나오지만 여왕의 소프트파워 가치와 견줄 수는 없다. “정치는 우리를 분열시키는 것에 관한 것이고, 군주제는 우리를 통합시키는 것에 관한 것”이라는 현지의 평가는 여왕의 재위 성과를 웅변한다.다큐멘터리의 여운은 절제와 관용이 사라진 우리의 현실 정치로 이어진다. 추석 전후 실시된 한 여론조사에서 국민의 44%가 ‘신뢰하는 정치인이 없다’고 답했다고 한다. 대통령을 향한 국민의 신뢰는 역대 최저 수준이다. 절제 속에 시대와 호흡하며 국민의 목소리에 귀 기울인 여왕의 유산은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