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삼성 TV 파나마 첫 수출 비화

삼성전자가 컬러 TV 개발에 성공한 것은 1976년이었다. 그때는 국내 판매가 허가되지 않아 해외시장을 뚫어야 했다. 낯선 회사 제품을 선뜻 사줄 바이어는 없었다. 앞길이 막막했다. 첫 수출 대상국은 뜻밖에도 중미의 파나마였다. 여기에는 극적인 일화가 숨겨져 있다.

수출 계약의 주역은 해외 영업사원 김영온 씨다. 1977년 봄, 미국 출장을 떠난 그는 파나마로 행선지를 변경하라는 긴급 지시를 받았다. 세계 최대 규모인 미국 시장에 앞서 파나마를 테스트 마켓으로 삼겠다는 것이었다. 이 나라의 전원과 방송시스템이 미국과 같다는 점도 한 요인이었다.급히 진로를 바꾸느라 샘플과 카탈로그가 없었다. 제품 사진 한 장이 전부였다. 이걸 들고 파나마시티의 판매상과 자유무역시장을 다 돌아다녔지만 “회사도 모르고 제품도 없는데 무슨 거래를 하느냐”는 소리만 들었다. 어느 날 그는 40대 유대인이 운영하는 판매상사를 찾아갔다. 이번엔 한 가지 꾀를 냈다. “통관에 걸려 샘플을 가져오지 못했지만, 우리 제품은 일본 마쓰시타와 기술 제휴로 생산하니 안심해도 좋소.”

사장이 호기심을 보이자 그는 “문제가 있으면 반품을 책임지고, 판매독점권도 주겠다”고 제안했다. 이렇게 해서 1차로 컨테이너 한 개분(약 250대)의 수출이 시작됐다.

그런데 TV를 켰더니 화면 아래위가 거꾸로 나왔다. 미칠 노릇이었다. 브라운관 TV의 전자계 방향이 지구 위도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을 미처 생각하지 못한 해프닝이었다. 부랴부랴 기기를 하나씩 뜯어고친 뒤에야 팔 수 있었다. 이런 위기를 넘긴 삼성 TV는 열흘 만에 매진됐고, 곧 미국 시장에 진출했다.그해 우리나라는 수출 100억달러를 달성했다. 올해 삼성전자의 TV 시장점유율은 31.5%로 17년 연속 세계 1위를 기록하고 있다. 부가가치가 높은 80형 이상 초대형 부문에서는 매출 점유율이 48.6%에 이른다. 컬러 TV 수출의 전초기지였던 파나마 현지 법인은 삼성전자의 첫 해외 지점이다.

엊그제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파나마를 찾아 대통령에게 2030년 부산엑스포 유치 지지를 요청하며 삼성과 현지 기업들의 협력 방안을 논의했다. 삼성은 내년 파나마에서 열리는 세계로봇올림픽 후원사이기도 하다. 반세기에 가까운 양측의 인연이 각별하고도 뭉클하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