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금 보릿고개부터 넘자"…K바이오, 신약임상 포기 속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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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공개 문턱 높아지며‘K바이오’가 전방위 위기에 직면했다. 신약 개발 바이오벤처들은 심각한 자금난에 빠졌다. 핵심 자산인 신약 후보물질(파이프라인) 축소에 나서는가 하면 창업자가 급여를 자진 삭감한 사례도 나왔다. ‘자금 빙하기’가 풀릴 기미가 없어 바이오벤처의 파산이 잇따를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바이오의약품 위탁생산(CMO) 업계는 반도체, 전기차에 이어 바이오도 ‘자국 생산’을 선언한 미국발(發) 악재까지 만났다.
VC 자금 지원까지 줄어
박셀바이오·파멥신·메드팩토 등
우선순위 밀린 신약개발 중단
'미래 경쟁력 기반' 상실 우려
자산매각·인력 감축하는 곳도
바이든 '바이오 자국생산' 강행
CMO업체도 美공장 확보 비상
파이프라인 구조조정 가속화
1년 넘게 바이오 자금줄이 막히자 바이오벤처가 가장 먼저 손을 대는 건 임상 개발 파이프라인이다. 성공 가능성이 낮거나 개발 속도가 느린 파이프라인이 구조조정 대상이 됐다. 자금 유입이 제한된 상황에서 돈 많이 드는 임상 개발을 동시다발로 진행하기엔 부담이 커서다. 수년간 수백억원의 자금을 쏟아부어야 하지만, 파이프라인 하나가 ‘잭팟’을 터뜨리면 조 단위 매출을 일으킬 수 있다는 점에서 임상 철회는 바이오산업에 악재다. 업계에선 “자칫 수년간 쌓은 신약 개발 노하우가 하루아침에 사라져버릴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박셀바이오, 파멥신, 메드팩토, 크리스탈지노믹스 등이 최근 비주력 파이프라인 임상 개발을 중단했다. 대전 지역 벤처캐피털(VC) 심사역은 “20억~30억원씩 드는 비임상 프로그램을 2~3개 동시에 진행하는 게 흔했지만 이제는 성공 가능성이 큰 파이프라인만 살려두고 나머지는 정리하는 분위기”라고 했다.
방사선 치료제를 개발하는 퓨쳐켐은 주력 파이프라인인 전립선암 치료제 개발에 집중하기로 했다. 알츠하이머와 파킨슨병 치료제 등 후속 파이프라인 개발은 잠정 보류했다. 상업화에 가장 근접한 파이프라인 개발에 한정된 자원을 집중 투자하겠다는 전략이다.과거 바이오벤처들이 파이프라인을 우후죽순 늘린 건 기업공개(IPO) 문턱을 넘기 위한 측면도 있었다. 상장 심사를 하는 한국거래소가 파이프라인이 하나뿐인 기업엔 부정적이었기 때문이다. 업계 관계자는 “파이프라인이 한 개뿐이면 임상 개발에 실패할 경우 투자자 피해가 크다고 보고 거래소가 상장 심사 때 후속 파이프라인 여부를 중요하게 따졌다”고 했다.
인력 감축도 본격화
고정비 지출을 줄이는 곳도 늘고 있다. 최근 비상장 바이오벤처 A사 대표는 급여 20%를 자진 삭감했다. 일부 임원은 5~10% 삭감에 동참했다. 임원에게 제공되던 업무 차량도 회수했다. 벤처캐피털의 자금 유치가 어려워진 와중에 상장 문턱까지 높아지면서 자금 운용 스텝이 꼬인 탓이다. 또 다른 바이오벤처는 직원 급여를 제때 지급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바이오벤처 B사 대표는 “비용 지출을 최소화하기 위해 숨만 쉬며 버티고 있다”고 말했다.대표적 코로나19 수혜 기업인 분자진단업체 씨젠은 급격히 늘려오던 인력을 줄이기 시작했다. 이 회사는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진단키트 주문이 폭주하면서 인력을 네 배 늘렸다. 하지만 수요가 줄고 고정비 지출만 늘어나자 인력 감축에 나섰다. 지난 3월 1187명이었던 직원 수는 3개월 새 46명 줄었다. 임원 수도 48명에서 42명으로 감소했다. 회사 관계자는 “당분간 인력 축소 기조가 이어질 수 있다”고 전했다.대전에 있는 C사는 바이오의약품 생산 공장을 짓기 위해 5950㎡(약 1800평) 규모 부지를 분양받았지만, 자금난에 은행권 대출을 제때 상환하지 못해 분양권을 회수당했다. 해당 부지는 재입찰에 부쳐질 예정이다.
안과 질환 치료제를 개발하던 바이오벤처 D사는 한때 상장을 추진할 정도로 성장했지만 최근 청산 수순에 들어갔다. 수차례 매각을 타진했지만 불발됐다. 기업가치에 대한 의견 차가 컸기 때문으로 알려졌다. 벤처캐피털 관계자는 “올 연말께는 바이오 기업의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 더욱 격화할 것”이라고 말했다.
발등에 불 떨어진 CMO
바이오의약품 위탁생산(CMO)업계도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삼성바이오로직스는 국내 생산 설비만으로 설립 10여 년 만에 세계 최대 CMO가 됐지만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가 바이오 분야에도 ‘자국 생산’ 정책을 공식화하면서 미국 진출이 불가피하게 됐다. 현지 공장 건설과 인수합병(M&A) 등 미국 진출 방식을 검토해 왔지만 아직 결론을 내지 못했다. 셀트리온 관계자는 “바이오의약품 생산이 가능한 여러 지역을 확보하고 있다”면서도 “미국 내 생산시설 확보를 적극 검토하겠다”고 했다.한재영 기자 jyh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