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세 인간] ⑦ "할머니, 500원 줄게 담배 좀 사다 주세요"

길거리 흡연 학생들 껴안아 학교 보낸 할머니의 '포옹'
"평범한 노인들도 이웃 사랑 실천에 앞장"
[※ 편집자 주 = 베이비부머 세대(1955∼1963년생)가 노인층의 핵으로 진입하면서 노인 인구가 급증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65세 이상의 노인 비율이 2018년 14.4%로 '고령 사회'에 들어선 데 이어 2025년 20.6%로 '초고령 사회'에 들어설 것으로 예상된다.

100세 이상 역시 1990년 459명에서 2020년 5천581명으로 10배 이상 증가했다.

수명이 점점 길어져 '고령 국가' 탄생을 예고하고 있다. 고령화 시대를 사는 노인에게 돈과 건강만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젊은 층과 세대 갈등, 외로움과 고독, 가족·사회와 분리되는 소외 등을 들여다보아야 할 시점이다.

연합뉴스는 노인이 존엄성을 지키며 행복한 삶을 위해 개인과 사회, 국가가 무엇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 15편에 걸쳐 인문학적 관점에서 살펴보자고 한다. ①∼④편은 한국 노인의 실상과 실태를, ⑤∼⑩편은 공동체에 이바지한 노인들을, ⑪∼⑮편은 선배시민 운동과 과제 등을 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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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담배 좀 사다 줘요. 500원 드릴게요.

"
몇 년 전 노인복지관을 나서 집으로 가던 최풍자(80·경기 안산)씨는 귀를 의심했다.

"뭐라고?"
되묻는 최씨에게 남학생은 "저 대신 담배 좀 사다 주세요"라고 당당하게 말했다.

최씨는 순간적으로 기분이 상하고 화가 치밀었지만, 곧 마음을 다잡았다.

그동안 복지관에서 수강한 '선배 시민교육' 덕분일까.

'나는 선배 시민이다.

선배 시민은 마중물로서 후배 시민이 잘 성장하도록 도와야 한다'는 생각이 떠오른 최씨는 남학생을 가까이 오라고 한 뒤 와락 껴안았다.

"몸에 해로운 담배를 사달라는데, 그걸 사주면 내 꼴은 뭐가 되고, 또 너는 뭐가 되겠니? 이건 아닌 거 같다.

너는 건강하게 자라야 할 청소년이야"라고 나지막하게 말했다.

남학생은 어리둥절하고 당황한 표정으로 "다신 안 그럴게요.

할머니"라며 사과했다.
한번은 아침에 시장을 가던 중 길거리에서 담배 피우는 여학생이 눈에 띄었다.

그는 여학생에게 다가가 꼭 껴안아 준 뒤 "이렇게 예쁜데, 담배 피우면 피부도 나빠지고 입 냄새도 심해져. 또 아빠·엄마가 얼마나 실망하시겠니!"라고 속삭였다.

여학생은 곧바로 담배를 껐다.

그러면서 "공부는 하기 싫고, 학업은 점점 따라가기 어렵고, 엎드려 자면 선생님께 혼나고…"라며 자신의 꿈이 가수라고 했다.

최씨는 "노래를 해보라 하니 진성의 '보릿고개'를 어찌나 잘 부르던지 박수가 절로 나왔다"며 그때를 회상했다.

여학생은 "지금까지 담배 피우는 것을 본 어른들은 야단치거나 욕만 했는데, 안아주고 소통하려는 할머니는 처음"이라며 할머니의 휴대전화 번호를 적은 뒤 총총히 사라졌다.

그 후 여학생의 이야기를 들은 부모가 "고맙다"고 연락이 왔고 여러 차례 만났다.

그 여학생은 캐나다 유학을 다녀온 후 어엿한 직장인이 돼 지금도 최씨에 대한 고마움을 간직하며 표현한다고 한다.

박길석 안산 단원구 노인복지관 복지1과장은 "최 할머니는 노인복지관에서 실시하는 선배 시민 교육을 비롯한 인문학 강의를 2011년부터 거의 10년간 한 번도 빠지지 않았다"고 전했다.

최씨는 요즘 다문화가정 아이들에게 하모니카와 민요를 가르치는 것과 소외된 이웃들을 집으로 불러 음식을 나눠 먹는 것에 재미와 뿌듯함을 느끼고 있다.
"된장과 부침개밖에 없는 밥상이지만, 혼자 먹는 것보다 끼니를 챙기기 어려운 이웃들과 같이 먹으면 몇 배 더 맛있고 관계를 유지하니 외로울 틈이 없다"는 최씨는 얼마 전 폐지 줍는 이웃의 나눔에 대해서도 귀띔했다.

최씨보다 대여섯 살 적은 A씨는 폐지를 주워 근근이 생계를 잇고 있지만, 최씨를 만날 때마다 1천원 혹은 2천원을 쥐여준다고 한다.

최씨는 "제가 동네의 어려운 이웃들을 돕고 있다는 소문을 들은 그 동생이 '좋은 일에 써달라'며 천 원짜리 지폐 두 장을 건네는데, (그 동생의) 형편을 뻔히 알고 있어서 처음에는 선뜻 받을 수 없었다"고 떠올렸다.

이어 "하지만 선한 마음이 고마워서 몇천 원씩 받아 모은 돈이 3만8천원이나 돼서 최근 추석 때 작은 선물 여러 개를 사 동네 노인들에게 돌렸다"고 덧붙였다.

최씨가 가끔 들러 수발을 들던 동네 독거노인 B씨의 사연을 이야기할 때는 눈가가 촉촉해졌다.

어느 날 거동이 불편한 B씨는 최씨가 찾아오자 "그동안 고생했어. 만약 내가 어떻게 되면 장롱 맨 위 서랍을 열어보라"고 당부했고, 그로부터 사흘 후에 돌아가셨다고 한다.

이후 최씨는 동네 교회 목사와 함께 B씨의 집에 들어가 서랍을 열었다.

봉투가 있었고 그 안 종이에는 300만원과 함께 "사회에서 받은 사랑이 크다.

나 죽으면 좋은 일에 써달라"는 짤막한 글귀가 삐뚤삐뚤 적혀있었다.
최씨는 "주변의 가난하고 병든 노인들도 이웃을 생각하며 크고 작은 나눔을 실천하는 사례가 많다"면서 "공동체 속에서 관계를 맺고 연대하는 이런 평범한 노인들이 선배 시민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그러면서 선배 시민 교육을 받은 후 달라진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고 덧붙였다.

그는 "겸손함을 배웠고, 나를 위해 살던 삶이 남을 위한 삶으로 점차 확장됐다"고 말했다.
오정자(81)씨도 선배 시민의 길을 걷고 있다.

노인복지관의 '선우회(선배 시민 친구들 모임)' 회장을 맡은 오씨는 서울에서 살다 10여 년 전 경기 평택시의 작은 읍으로 이사 온 후 '환경 지키기'에 적극적이다.

오 회장은 '후대에 남겨줄 것은 깨끗한 환경이며 환경 의식은 어릴 때부터 접해야 한다'라는 생각에 유치원과 어린이집을 돌며 영상교육을 통해 환경 문제의 심각성을 알리고 전등 끄기, 수돗물 아껴 쓰기 등 생활 속의 실천 방법들을 전파하고 있다.

내년부터는 이를 중·고교 등으로 확대할 계획이다.

특히 10명의 선우회 회원들은 틈날 때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이후 길거리 곳곳에 버려지는 마스크를 줍는 일에 열중하고 있다.

오 회장은 "환경이 파괴되면 일도 하지 못하고 건강도 잃게 된다"면서 "우리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은 하고, 안 되는 일은 시청이나 공동체에 개선을 요구하고 있다"며 환경 개선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그러면서 "동갑내기 남편과 별 탈 없이 평범하게 일생을 살았다.

하지만 삶을 돌아보니 사회에 보탬 되는 일을 하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면서 "선배 시민 교육을 받은 후 이웃과 사회를 돌보며 살자고 작정했다"고 말했다. 그는 최근 난타, 고전 무용, 젬베(아프리카 북) 등을 배운 뒤 요양원을 찾아 공연하는 활동에 보람을 느낀다고 덧붙였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