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속 피를 지우려…김창열은 물방울을 그렸다

김창열 다룬 첫 다큐
'물방울을 그리는 남자' 28일 개봉

작년 92세로 별세한 김 화백
전쟁 트라우마·고향 향한 그리움
50년간 물방울 그리며 위로 받아
방탄소년단 RM도 작품 소장

김 화백 아들 김오안 감독 메가폰
佛 브리지트 부이요 감독 공동 연출
짜임새 있는 구성 영상미도 뛰어나
다큐멘터리 ‘물방울을 그리는 남자’에서 김창열 화백이 손자와 함께 가위바위보를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흘러내리는 물방울, 타원형 물방울, 글자 위에 맺힌 물방울…. 물방울 하나만 50여 년간 그린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물방울 화가’ 고(故) 김창열 화백(1929~2021)의 작품 세계와 삶을 다룬 다큐멘터리 ‘물방울을 그리는 남자’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스토리다.

연출을 맡은 아들 김오안 감독은 다큐멘터리 속 내레이션을 통해 묻는다. “하나의 물방울을 그리는 건 하나의 구상이다. 수십 개의 물방울을 그리는 건 하나의 계획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돼야만 수십만 개의 물방울을 그리는 예속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을까.”

“모든 불안을 물로 지운다”

오는 28일 개봉하는 이 작품은 세계적인 사랑을 받은 한국 추상미술의 거장 김 화백의 이야기를 다룬 첫 다큐멘터리다. 김 화백은 지난해 92세로 별세했다. 작가는 떠났지만, 작품은 여전히 사랑받고 있다. 방탄소년단(BTS)의 리더 RM이 김 화백의 팬이라며 자신이 소장한 물방울 그림을 공개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의 작품들은 한국미술시가감정협회 추산으로 지난해 낙찰총액 4위(200억원)를 차지했다. 그의 앞에 있는 이름은 이우환(394억원), 구사마 야요이(365억원), 김환기(214억원)뿐이었다.

다큐멘터리는 김 화백의 둘째 아들이자 뮤지션, 포토그래퍼로 활동하고 있는 김 감독과 프랑스 아티스트 브리지트 부이요 감독이 함께 연출했다. 김 감독은 내레이션도 맡았다.

작품은 김 화백의 과거 인터뷰 영상부터 마지막 모습까지 넉넉하게 담았다. 김 화백은 프랑스 파리에서 활동하던 어느 날 물감 위에 뿌려둔 물이 만들어낸 물방울의 신비로움에 매료됐다. 그리고 1971년 첫 번째 물방울 작품인 ‘밤에 일어난 일’을 시작으로 줄곧 물방울만을 그렸다.이 물방울엔 그의 마음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죽음에 대한 커다란 상처가 서려 있다. 평안남도 맹산에서 태어난 그는 일제강점기와 6·25전쟁 등 격동기를 겪었다. 가족과 생이별해야 했고, 수많은 사람의 죽음도 지켜봐야 했다. 그런 김 화백에게 물방울은 마음의 안식이자 위로였다. 김 화백은 말한다. “물방울은 모든 기억을 지우기 위한 것이다. 나는 모든 악과 불안을 물로 지운다.”

달마대사 같았던 구도자적 면모

다큐멘터리에선 김 화백의 구도자적인 면모도 엿볼 수 있다. 김 화백은 아들이 어렸을 때부터 달마대사 이야기를 종종 했다고 한다. 잠들지 않기 위해 눈꺼풀을 자르고, 9년간 면벽수행(벽을 마주하고 수행하는 것)한 그 스님 말이다.

카메라는 그가 달마대사처럼 벽에 그림을 세워둔 채 가만히 바라보며 명상하는 듯한 모습을 자주 포착한다. 이 명상은 그에게 창작의 동력이 됐다. 김 감독은 “아버지는 연금술사처럼 화실에 머무르며 작업에만 매달렸다”며 “아버지는 전쟁에서 본 모든 피가 순수한 물로 바뀔 때까지 평생 그리고 또 그렸다”고 말했다.이 작품은 다른 예술 다큐멘터리에 비해 아티스트의 내면을 훨씬 더 깊게 파고든다. 오랜 시간 아버지를 지켜본 아들이 메가폰을 잡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김 감독은 “다큐멘터리를 찍으면 아버지에게 물어보고 싶은 걸 다 물어볼 수 있을 것 같아 연출을 맡았다”며 “돌아가시기 전까지 아버지와 많은 시간을 함께하고 싶었던 측면도 있다”고 말했다. 김 화백은 이런 아들 앞에서 목숨 걸고 휴전선을 넘던 순간을 떠올리며 어린아이처럼 울음을 쏟기도 했다.

그렇다고 김 감독이 아버지와 살가운 사이였던 것만은 아니다. 김 감독은 “자라면서 가장 힘든 것 중 하나가 아버지의 침묵이었다”고 했다. 김 화백은 말수가 적고 무뚝뚝했다고 그는 전했다. 김 감독은 아버지를 범접할 수 없는 위인으로 그리지도 않는다. 김 화백이 유명해지는 것을 싫어하거나 멀리하는 예술가가 아니었다는 것도 보여준다. 김 감독은 “아버지를 존중하되 최대한 절제하며 접근했다”며 “결코 그를 신성화하려 하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작품의 전체적인 완성도는 높은 편이다. 영상미도 뛰어나다. 짜임새 있게 구성된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김 화백의 예술 세계를 이해하게 된다. 엔딩 크레디트가 오를 때면 고개가 절로 끄덕여진다. 김 화백이 왜 50년 넘게 물방울에 그토록 집착했는지를. 그 물방울 하나하나에 담긴 눈물과 불안의 의미를.

김희경 기자 hk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