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 동원령’까지 선포한 푸틴…벼랑 끝 전술 통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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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엔 승리 아니면 핵전쟁뿐"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21일(현지시간) 부분적인 군 동원령을 선포했다. 전문가들은 푸틴 대통령이 절망적인 상황을 타개하려 벼랑 끝 전술을 펼친다고 분석했다.
정기 훈련 안받은 예비군으론 전세 역전 실패
러시아 국민 반발은 법개정으로 억눌러
내부 반발 심해져 "푸틴은 곧 몰락"
벼랑 끝에 몰린 러시아, 패배 인정할 가능성은 無
푸틴 대통령은 “서방이 러시아를 파괴하려 한다면 러시아 보호를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하겠다”고 강조했다. 그는 다만 이번 동원령이 전면적이 아닌 부분적 동원령임을 강조하며 “부분 동원령의 대상은 전투 경험이 있는 예비역 군인들이 될 것”이라고 했다. 러시아 국방부는 이와 관련해 예비군 30만 명을 동원할 것이라고 발표했다.사실상 핵 공격을 염두에 둔 발언이란 분석이다. 푸틴 대통령은 연설에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주요국 고위 인사들이 러시아에 대해 핵무기를 사용할 수 있다는 발언을 하고 있다”며 “그런 발언을 하는 사람들에게 러시아도 다양한 파괴 수단을 갖고 있음을 상기시키고 싶다”고 했다.러시아는 전날 우크라이나 점령지를 병합하려 23~27일 주민투표를 강행한다고 발표했다. 돈바스(동부) 루한스크주와 도네츠크주를 비롯해 남부 자포리아주와 헤르손주를 편입할 계획이다. 편입이 성사되면 러시아는 국토방위를 병력 증강 명분으로 내세울 수 있게 된다.
러시아의 대표적인 올리가르히(신흥재벌)인 콘스탄틴 말로페예프는 파이낸셜타임스(FT)와의 인터뷰에서 “세계인은 러시아의 승리를 기원해야 할 것”이라며 “만약 우리가 승리하지 못한다면 핵 재앙으로 귀결될 것”이라고 밝혔다. 러시아가 절대 패배를 인정하지 않을 거란 지적이다.
30만 예비군 동원해도…승리 가능성은 작아
서방국가는 이번 동원령이 러시아의 상황을 보여준다고 해석했다. 벤 월러스 영국 국방부 장관은 “푸틴 대통령의 군 동원령 발표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실패하고 있다는 방증이다"라고 지적했다. 브리짓 브링크 주우크라이나 미국 대사도 이날 "러시아의 가짜 주민투표와 군 동원령은 쇠약함과 실패했다는 증거다”라고 밝혔다.전문가들은 러시아가 예비군을 동원해도 승리할 가능성이 작다고 입을 모았다. 정기적으로 훈련받지 않은 병력이라서다.
국방 싱크탱크인 전쟁연구소(ISW)에 따르면 러시아 예비군은 200만명으로 편성됐지만 실질적으로 전투 준비가 된 병력은 없는 상황이다. 미 싱크탱크 랜드연구소는 러시아는 2021년에 본격적으로 상설예비군 제도를 정착시켰지만 4000~5000여명의 예비군만이 정기적인 훈련을 받았다고 분석했다.사무엘 타랍 랜드연구소 선임연구원은 “러시아의 동원령이 서방국가를 위협해 항복을 유도하는 용도로 쓰인다면 전혀 효과가 없을 것”이라며 “되레 실패해서 푸틴에게 뼈아픈 선택이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러시아군은 지난 2월 우크라이나를 침공할 당시 18만여명의 정규군을 동원한 것으로 추정된다. 미 국방부는 8월까지 러시아군 사상자가 7만~8만명에 이를 것으로 관측했다. 정규군으로도 패배했는데 예비군으로 전황을 뒤집긴 어려울 거란 설명이다.
두 딸 아빠는 전쟁터 나가고, 국회의원은 면제
러시아 내부에서도 동원령에 대한 반발이 거세다. 주로 러시아의 SNS인 텔레그램을 통해 동원령의 실체가 공유되고 있다. 동시에 동원령을 피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이번 동원령에 따르면 사실상 모든 국민을 징집 대상으로 삼고 있다. 동원령 세부 내용을 살펴보면 1차 소집 대상자에는 사병(35세 이하)부터 장교(65세 이하)까지 군 경력이 있는 자를 대상으로 지정했다. 2차 소집 때는 건강상의 이유로 전역한 자들을 대상으로 삼을 방침이다. 3차 소집 대상자는 군사 교육 경험이 있는 여성을 비롯해 군사 교육을 받은 45~50세 남성을 포함한다.러시아의 반정부 인권운동가인 파벨 치코브는 동원령과 소환장을 텔레그램을 통해 공유하며 저항의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다. 동원령이 선포되자마자 22일 동원령에 대한 법적 대항력에 관한 공개 세미나를 개최한다고 발표하기도 했다.치코브에 따르면 러시아 국민들이 동원령에 대해 우려하는 사안은 제7항이다. 총 10개 항으로 이뤄진 동원령에 유일하게 구체적인 조문이 적히지 않은 부분이라서다. 동원 병력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명시된 바가 없다. 대통령이 재량권을 세르게이 쇼이구 국방부 장관에
게 위임했을 뿐이다.쇼이구 러시아 국방장관은 예비군 소집 대상을 직업 군인으로서 경험이 있는 자들로 제한하며 학생들과 징집병은 소집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러시아 크렘린궁은 브리핑에서 소집 대상자들의 출국을 제한할 것인지 질문을 받았지만 즉답을 거부했고, 명확한 법이 나올 때까지 인내심을 가져 달라고 촉구했다.
동원령 면제 대상에도 불만이 쌓이고 있다. 동원령 18조 6항에는 러시아 연방 평의회 위원 및 러시아 연방의회 하원 격인 국가두마(state duma) 의원들은 동원령에서 제외된다고 적혀 있다. 다른 예외 조항과 비교하면 자녀가 3명 이상 있는 부모와 국회의원이 동일한 취급을 받는 셈이다. 의사가 인정한 건강상 문제로 병역을 질 수 없는 국민이라도 최대 6개월까지만 소집을 유예할 수 있다
정치컨설팅업체 R.폴리티크 설립자인 타티아나 스타노바야는 “동원은 점차 확대될 것이고, 러시아 사회의 분노는 극대화 될 것”이라며 “분노의 물결이 곧 푸틴을 끌어내릴 것”이라고 내다봤다.
처벌 규정 강화하자…동원 피해 터키로 탈주
러시아 당국은 반발을 잠재우려 미리 법을 개정했다. 전날 러시아 연방의회 하원 격인 국가두마(state duma)를 통해 헌법 개정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전시상황이나 동원령 등과 관련한 조항을 담았다. 또 적에게 투항하거나 동원령을 거부한 이에게 10년 징역형을 내리는 등의 내용이 포함됐다. 군수 사업체가 러시아군에 협조하지 않을 경우에는 처벌한다는 조항도 들어간 것으로 알려졌다.입단속도 강화했다. 러시아 경제지 콤메르산트에 따르면 이날 러시아 미디어 감독기관인 로스콤나조르는 러시아 현지 언론사에 “연방정부와 지방정부가 발표하지 않은 자료를 기사로 배포하는 건 법률 위반이다”라며 “출처가 명확지 않을 경우 (언론사를) 허위 정보 유포로 간주해 처벌한다”고 경고했다.
하지만 이미 러시아 국민은 국경을 넘어가는 중이다. 무비자 입국이 가능한 터키 이스탄불과 아레미나 예레반으로 향하는 모스크바발 직항편이 이날 매진됐다. 모스크바에서 조지아의 수도인 트빌리시로 가는 노선을 포함한 일부 경유 노선도 이용이 불가했다. 아랍에미리트(UAE), 두바이로 가는 항공편은 가격이 평소보다 약 5배인 30만루블(약 683만원)까지 뛰었다.러시아 관광 당국은 지금까지 해외 여행에 어떤 제한도 부과하지 않고 있다고 밝혔다. 러시아 국적 항공사 에어로플로트 또한 항공권 판매를 제한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냈다.
오현우 기자 oh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