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두현의 아침 시편] 오, 황야도 충분히 천국일 수 있지

나뭇가지 아래


나뭇가지 아래 시집 한 권
포도주 한 잔, 빵 한 덩이
그리고 네가 내 옆에서 노래한다면
오, 황야도 충분히 천국일 수 있지.
* 오마르 하이얌(Omar Khayyam, 1047~1131) : 페르시아 시인. 시집 『루바이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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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시아 시인 오마르 하이얌의 루바이(4행시)입니다. 루바이는 페르시아 문인들이 친구들과 흥겹게 어울리며 읊조린 4행짜리 즉흥시를 말합니다.

오마르 하이얌의 시집 제목이기도 한 ‘루바이야트’는 루바이의 복수형, ‘4행시 모음’을 뜻하지요. 신용카드 사업의 아버지인 디 호크가 ‘비자’를 창업할 때 이 시집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합니다.

사후 700년 만에 세계적인 시인으로

시인의 성 하이얌은 ‘천막을 만드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그의 아버지 직업과 연관이 있는 듯합니다. 하이얌이 태어난 곳은 오늘날 이란의 북동부 지역. 어릴 때부터 총명했던 그는 당대 최고 철학자와 수학자, 천문학자로 이름을 날렸고 1131년 고향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생전에 시인으로서는 별로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죽은 지 700년 뒤인 19세기에 갑자기 세계적인 스타가 됐습니다. 영국 시인 에드워드 피츠제럴드가 영어로 옮긴 시집 『루바이야트』 덕분이었지요.

1859년 영국에서 발행된 이 시집은 1878년 미국에서도 출간됐습니다. 나오자마자 베스트셀러가 됐고, 이후 영미문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죠. 하이얌의 시 구절은 유명 작품의 제목이나 인용문, 관용어구 등으로 무수히 활용됐습니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미국 극작가 유진 오닐의 『아, 황야 (Ah, Wilderness)』는 그의 시 ‘오, 황야도 충분히 천국일 수 있지’라는 시 구절에서 따왔죠. 오닐의 여러 희곡 중 이 작품이 유일한 로맨틱 코미디라는 점에서 하이얌의 낙관주의와 서로 통하는 것 같습니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장편 추리소설 『움직이는 손가락(The Moving Finger)』도 하이얌의 시 ‘움직이는 손가락은 쓴다, 썼다./ 네 아무리 기도를 바치고 재주를 부린들,/ 되돌아 한 줄도 지울 수 없지./ 눈물 흘린들 한 단어도 씻어낼 수 없지’에서 가져온 제목이지요.

밥 딜런 가사, 이란 인공위성 이름도

‘황무지’로 유명한 노벨문학상 수상시인 T.S. 엘리엇은 하이얌의 시를 읽고 “세상이 새롭게 보였다”고 했습니다. 그는 피츠제럴드의 영역시집을 읽은 소감을 ‘시의 용도와 비평의 용도’라는 글에서 이렇게 고백했죠. “열네 살 무렵 내 주위에 놓여 있던 피츠제럴드의 ‘오마르’를 우연히 집어 들었던 그 순간을, 그 시가 내게 펼쳐 보인 감정의 새 세계로 압도당한 채 끌려 들어갔던 것을 아주 또렷하게 기억한다. 그것은 느닷없는 개종과도 같은 것이었다. 이 세계는 눈부시고 유쾌하고 고통스러운 색깔로 채색돼 새롭게 나타났다.”

SF소설의 거장 아이작 아시모프도 하이얌에 매료돼 장편 『영원의 끝』에 그의 시를 인용했습니다. 이 밖에 그의 시를 음악으로 해석한 작곡가가 100여 명, 그림을 그린 화가가 150명이 넘습니다. 2016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밥 딜런의 노래 가사에도 여러 차례 인용됐지요.

얼마 전 발사한 이란의 정찰·관측용 인공위성 이름 또한 ‘하이얌’입니다. 중세 페르시아의 시인 이름이 21세기 지구촌을 넘어 우주 공간까지 비추고 있으니, 시의 힘이야말로 위대하고도 영원한 것 같습니다.

내친김에 그의 시 한 편을 더 감상해 봅니다.

젊은 날 성현들을 찾아다니며
이것저것 높은 말씀 들어봤건만
언제나 같은 문을 출입했을 뿐
나 자신 깨우친 것 하나 없었네.
■ 고두현 시인·한국경제 논설위원 : 199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늦게 온 소포』,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 『달의 뒷면을 보다』 등 출간. 시와시학 젊은시인상 등 수상.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