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反ESG’ 선봉 나선 미국 텍사스주…안티 펀드도 등장
입력
수정
ESG에 대한 미국 정치권의 맹공이 격렬해지고 있다. 텍사스주가 화석연료 기업에 배타적인 투자를 한 것으로 판단된 10개 금융사를 보이콧 대상으로 지정했다. 플로리다주도 공적 연금에서 ESG 투자를 후순위로 두는 내용의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ESG 의제에 반대표를 행사하는 쪽으로 투자 방침을 잡은 ’안티ESG 펀드‘도 등장했다[한경ESG] ESG NOW미국 50개 주 중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에 반기를 든 선봉은 텍사스주다. 텍사스주는 전통적 화석연료 산업지대일 뿐 아니라 공화당의 텃밭으로 불리는 지역이다. 지난 8월 글렌 헤거 텍사스주 감시관은 “에너지산업에 적대적인 10개 금융사와 384개 펀드를 텍사스주의 연기금 투자 대상에서 배제한다”고 밝혔다. UBS, 크레디트스위스, BNP파리바, 단스케은행, 노르디아은행, 스벤스카은행 등 9개 유럽 금융사가 보이콧 대상으로 이름을 올렸다. 미국 금융사로는 블랙록이 유일했다.
이번 조치는 지난해 9월 텍사스주 의회를 통과한 ‘에너지 차별 철폐법’에 바탕을 두고 있다. 화석연료 산업과 거래를 거부하는 기업에 대해 사업을 제한할 수 있도록 한 내용이 이 법안의 골자다. 헤거 감시관은 “ESG 운동으로 인해 알부 금융사가 더 이상 주주나 고객들의 이익을 위한 결정을 내리지 않고 있다”며 “대신 사회·정치 의제를 관철하기 위해 금융 영향력을 활용하고 있다”고 비판했다.미국 공화당, ESG 반대 움직임 표면화
보이콧 기업 중 유일한 미국 금융사로 이름을 올린 블랙록은 이 결정에 즉각 반발했다. 성명문에서 블랙록은 “화석연료를 보이콧하지 않았을뿐더러 텍사스 에너지 기업에 1000억달러 이상을 투자하고 있다”며 진화에 나섰다. 블랙록은 텍사스주에 본사를 둔 에너지기업 엑손모빌의 2대 주주다. 블랙록은 “국가 연금을 정치화하고, 투자 접근을 제한해서 퇴직자의 재정적 수익에 영향을 미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고도 덧붙였다.
플로리다주에서도 ESG를 배척하는 결정이 나왔다. 론 드산티스 플로리다주 주지사는 지난 8월 23일 주 공적 연금이 ESG를 고려하지 않고 수익을 최우선하는 방식으로 투자할 것을 지시하는 결의안을 주지사 직권으로 통과시켰다. 드산티스 주지사는 “ESG와 다양성, 포용성, 평등이라는 완곡한 기치 아래 금융 투자 우선순위가 왜곡되면서 기업들의 역량이 미국인들에게 이데올로기를 확산시키는 데 쓰이고 있다”고 비판했다.‘안티 ESG’ 행보가 적극적으로 지지를 얻고 있는 상황은 아니다. 연금운용사들은 대체로 ESG 경영에 근거한 투자를 여전히 지지하는 입장이다. 지난 9월 16일 블룸버그에 따르면, 브라이언 그래프 미국퇴직협회(ARA) 최고경영자(CEO)는 “저축을 하는 이들이 원하는 경우 ESG를 포함한 (투자) 계획을 자유롭게 확보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약 1600억 달러를 운용하는 텍사스주 교원 퇴직 연금의 대변인은 의견을 밝히진 않았지만, ESG가 장기 수익과 투자 위험성에 중요한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암시하는 자료를 웹사이트에 게재했다.
ESG 투자의 중요성을 재차 강조하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벨기에 연금운용사인 펜션스유럽의 마티 레팔라 CEO는 “연금은 단기 성과에 집중하는 산업이 아니므로 투기 성격을 띠는 에너지 시장에서 단기 이익을 노리는 건 적합하지 않다”며 “ESG를 고려하지 않으면 연금 가입자들의 투자 위험성도 높아진다”고 강조했다. 블룸버그는 “ESG 지수는 2020년 이후 기존 주식시장의 벤치마크보다 수익률은 더 높으면서도 변동성은 낮았다”며 “블룸버그 ESG 지수의 총수익은 2014년 이후 기존 에너지에 투자한 최대 상장지수펀드(ETF)보다 6배 이상 높았다”고 설명했다.
안티 ESG 펀드, 6주 만에 3억 달러 유치ESG 경영에 반대하는 ETF도 등장했다. 미국 신생 금융업체인 스트라이브자산운용은 지난 8월 안티 ESG 펀드인 ‘스트라이브 US 에너지 ETF’를 출시했다. 9월 15일엔 두 번째 펀드인 ‘스트라이브 500 ETF’도 내놨다. 두 펀드 모두 “고객에게 양질의 제품이나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과 무관하게 사회적·정치적 의제를 심화시키려는 이사회 구성이나 제안에 반대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대놓고 ESG를 반대하진 않았지만, ESG 투자 흐름과 대척점에 있던 펀드들은 이미 존재했다. ‘MAGA ETF’, ‘악덕 ETF’, ‘BAD ETF’ 등이 그렇다. 이들 펀드는 이사회에서 ESG 의제에 반대표를 던지는 것보다는 도박, 주류, 마약 등 소위 ‘죄악 사업’에 투자하는 데 집중했다. 운용자산 규모는 많아봐야 3000만 달러 수준에 불과했다. 반면 스트라이브US에너지는 출시 6주 만에 운용자산 규모를 3억3000만 달러로 늘렸다. ESG 경영에 반감을 지닌 투자자가 상당히 많다는 방증이다.
비벡 라마스와미 스트라이브자산운용 회장은 “사회·정치·문화·환경 목표가 중요하지 않다는 게 아니다”며 “이들 목표는 큰손인 펀드매니저에 의해 기업에서 실현될 게 아니라 정치적 과정을 통해 해결돼야 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스트라이브자산운용은 앞으로도 ESG 투자의 선두주자인 블랙록의 펀드와 대척점에 있는 펀드들을 내놓을 계획이다.안티 ESG 펀드의 인기엔 그간 ESG업계가 도외시한 화석연료 업체들이 올해 횡재에 가까운 수익을 냈다는 점이 깔려 있다. 화석연료 업체들은 2010년대 초반 셰일 혁명으로 유가가 급락하면서 수익성 악화를 겪었다. 설상가상으로 블랙록, 뱅가드 등 대형 투자사가 ESG 경영을 강조하면서 화석연료 산업의 입지가 좁아지기도 했다.
하지만 지난 2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면서 에너지 공급난이 발생하자 상황이 달라졌다. 화석연료 종목은 고유가에 힘입어 뜨거운 주식이 됐다. 반면 ESG 투자 열기는 한풀 꺾였다. 올해 들어 지난 8월 10일까지 미국 ESG ETF에 유입된 자금 규모는 40억 달러 남짓에 불과하다. 2021년(360억 달러)의 9분의 1 수준이다.
파이낸셜타임스는 “ESG 찬반 세력을 동시에 만족시키는 것은 어려운 일”이라며 “펀드업계가 미국 시장에서 단일 전략을 형성하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주현 한국경제 기자 dee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