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여파로 가격 급등락…배출권 거래제 ‘흔들’

유럽탄소배출권 시장이 급등락을 반복하고 있다. 배출권 가격이 안정적으로 조금씩 우상향하던 지난해와는 사뭇 다른 움직임이다.탄소배출권의 변동성이 커진 건 러시아의 천연가스 무기화 때문이다. 일부 유럽 국가를 중심으로 탄소배출권 거래제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고 있다
[한경ESG] ESG NOW
탄소감축을 위한 핵심 제도인 탄소배출권 거래제가 위기를 맞고 있다. 러시아발(發) 에너지 대란으로 배출권 가격이 급등락을 반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럽 내 일각에선 배출권 거래제 중단 요구까지 나오고 있다.지난 9월 23일 미국 파생상품거래소 ICE에 따르면 유럽 탄소배출권(EUA)의 톤당 선물가격은 9월 22일 기준 70유로를 기록했다. 한 달여 전 100유로 가까이 폭등한 배출권 가격은 다시 급락세를 보이고 있다. 급등락을 반복하는 현상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유럽 탄소배출권은 경기 불안과 지정학적 위기가 특히 불거진 올해 들어 짧은 기간 급등락을 반복하며 시장에 혼란을 가져왔다. 지난 2월 초 96유로까지 폭등한 배출권은 한 달 만인 3월 초 50유로 중반 선까지 급락했고, 5월 다시 90유로대로 올랐다. 이후에도 최근까지 등락을 거듭하고 있다.

폭등 후 급락, 다시 폭등 반복

유럽 내 또 다른 시장인 영국 탄소배출권(UKA) 시장도 마찬가지다. 올 초부터 급등락을 이어오던 영국 탄소배출권은 지난달 말 톤당 97파운드까지 폭등했다가 지금은 75파운드 선에서 거래되고 있다.배출권 가격이 안정적으로 조금씩 우상향하던 지난해와는 사뭇 다른 움직임이 관찰되고 있다. 배출권 가격 변동성이 커지면서 국가나 기업의 불확실성이 과도해졌다는 평가가 나온다. 기업들은 할당받은 탄소배출 허가량 이상의 탄소를 배출하는 경우 배출권을 사서 초과분을 충당한다. 이때 배출권 가격에 따라 저감 장치 등으로 탄소배출량을 줄일지, 시장에서 배출권을 구매할지 판단한다. 가격 변동성이 커지면서 경영 판단 자체가 어려워졌다는 분석이다. 또 단기간에 ‘오버슈팅’(일시적 폭등)하는 경우가 나타나면서 기업의 유동성 부담이 커지고 있다는 평가다.

탄소배출권의 변동성이 커진 것은 러시아의 천연가스 무기화 때문이다. 러시아는 러·우전쟁 이후 유럽에 대해 변칙적으로 가스 공급 제한을 발표하고 있다. 가스 공급 제한 이슈가 터질 때마다 배출권 가격 급등으로 이어지고 있다. 천연가스 수급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면 기업들은 탄소배출량이 큰 석탄과 석유를 사용해야 한다.

이런 상황에선 ‘기업의 탄소배출량 증가→배출권 수요 증가→배출권 가격 상승’으로 이어진다. 독일 전력회사인 우니퍼는 올해 상반기 탄소배출량이 전년 동기 대비 12% 증가했다고 발표했다.탄소감축 속도 조절론까지

배출권 가격의 변동성으로 국가 및 기업의 부담이 커지자 일부 유럽 국가를 중심으로 탄소배출권 거래제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최근 폴란드는 유럽연합(EU) 및 국제탄소배출권거래협회(IETA)에 유럽 탄소배출권 거래제를 중단하자고 요구했다. 폴란드의 요구대로 탄소배출권 거래제가 폐지될 가능성은 높지 않다는 분석이지만, EU 역시 이런 불만을 모른 체할 수는 없다.

일단 EU는 지금까지 한 번도 발동되지 않았던 ‘배출권 가격안정화 장치’를 활용해 배출권 공급을 늘리겠다는 방침이다. 기업의 탄소배출 할당량을 줄여 온실가스 저감 속도를 높이겠다는 중장기 계획을 잠시 접어두겠다는 뜻이다.한국도 올 들어 탄소배출권 가격의 변동성이 커지고 있다. 변동 폭에서는 EU나 영국보다 더 큰 변동성을 보이고 있다.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2022년 할당 배출권인 ‘KAU22’의 가격은 6월 말 1만7000원대였다. 9월 초 2개월 사이 2만7750원으로 60% 이상 뛰었다. 현재는 지난 9월 22일 기준 2만2400원에 거래되고 있다. 부담이 늘면서 기업들의 불만 역시 점점 커지고 있다. 향후 배출권 가격의 급등락이 이어진다면 한국에서도 배출권 제도에 대한 ‘위기론’이 제기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돋보기] 국내 탄소배출권 시장, “선물시장 도입 등 제도 개선 필요"

한국의 탄소배출권 시장이 러시아발 가스 대란의 직격탄을 맞은 EU나 영국 이상의 변동성을 보이면서 기업의 불만이 커지고 있다. 일반 투자자 배제, 선물 금지 등의 규제 때문에 시장 기능이 제대로 발동되지 않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지난 9월 23일 한국거래소 등에 따르면, 국내 배출권 시장의 규모는 EU 배출권 시장의 0.2%에 불과하다. 경제 규모나 탄소중립 속도 등을 고려해도 시장 활성화 정도가 너무 낮다는 지적이다. 충분한 수요와 공급이 나타나지 않기에 탄소배출권 가격의 안정성도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평가다. 시장이 작을수록 작은 외부 충격 등에 시장 교란이 나타날 가능성이 높다.

시장 참여자를 극도로 제한하는 현행 규제가 가장 큰 원인으로 꼽히고 있다. 현재 국내 배출권 시장에는 미리 정해진 회원사 690여 곳만 참여할 수 있다. 국책은행 2곳, 증권사 18곳 등의 금융회사와 670여 곳의 배출권 할당 대상 업체들이다. 철강, 반도체, 전기발전사업자, 수송업체 등의 기업들이 배출권 할당 대상 업체에 해당한다.

외부투자자 등은 참여가 불가능하다. 탄소배출권 투기 등을 막기 위함이라는 명목이지만, 오히려 가격 발견 기능을 저해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EU, 영국, 미국 등과 달리 선물시장이 열려 있지 않다는 점도 변동성을 키우는 원인으로 꼽힌다. 국내 기업의 경우 단기간의 지나친 가격 상승이나 하락이 예측된다 해도, 선물시장이 없어 위험을 ‘헤징’할 수단이 없다.

한국거래소는 이 같은 지적에 지난 5월 탄소배출권 선물시장 개설을 검토·준비하는 차원에서 ‘배출권 선물 상장 및 활성화 방안’ 연구용역 입찰을 공고했다. 하지만 5개월이 지난 아직까지도 특별한 제도 변화나 제도 개정 움직임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 탄소배출권 안정성이 점점 낮아지는 대외 국면인 만큼, 제도 개정을 서둘러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유럽 탄소배출권 ETF 등을 운영하는 박수민 신한자산운용 부장은 “탄소배출권 시장을 발전시키고 안정화하기 위해 유럽에서 도입한 제도가 제3자 투자와 선물시장”이라고 설명했다. 손승태 한국거래소 팀장은 “선물시장 등의 설계 방안과 도입 시기 등을 환경부와 협의 중”이라고 말했다.

성상훈 기자 upho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