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만금 줘도 車 못 산다" 날벼락…일본서 무슨 일이? [정영효의 일본산업 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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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제조 경쟁력의 상징 ‘Just in Time’ 시대 저문다
랜드크루저·렉서스LX·페어레이디Z 등 잇단 판매중지
랜드크루저 인도에 4년..2026년에 2022년식 받을판
중국 부품 의존도 4배 높였다 물류정체로 타격
적기생산 원조 도요타도 재고 급확대
'사양 오마카세'·생산체계 블록화, 대응전략 고심
도요타자동차의 랜드크루저는 1951년 처음 출시된 이래 71년째 대형 SUV의 왕좌를 지키는 SUV의 대명사다. 일본인들은 '란크루'라는 애칭으로 부른다. 하지만 이제는 세상의 금은보화를 다 주고도 랜드크루저를 살 수 없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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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 없어서 차를 못파는 이런 황당한 상황은 자동차 부품이 부족하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중국의 도시 봉쇄 여파로 중국에서 부품을 원활하게 공급받지 못하는 탓이다. 일본 완성차 업체들의 해외, 특히 중국 부품 의존도는 수치로도 입증된다.
부품이 없어서 소비자가 원하는 만큼 차를 못 만드는 상황, 일본 자동차 업체들은 어떻게 대응하고 있을까.
그런데 111가지 스타일과 별개로 판매 사양은 딱 3종류 뿐이다. 새차를 살 때는 고객이 선루프를 달 지, 시트를 가죽으로 할지, 휠 디자인을 교체할 지 등 옵션을 하나하나 정한다. 도요타의 신형 시엔타는 옵션 사양이 세 가지다.
선택의 폭이 줄어든 대신 고객은 2개월 만에 차를 받을 수 있다. 고객이 '내 취향대로 옵션을 고르겠다'라면 차를 받는데 8개월 이상이 걸린다. 취향을 반영하는 대신 1년 후에야 차를 받을 지, 도요타가 정해준 옵션대로 2~3개월 만에 차를 손에 넣을 지를 정하라는 제도다.옵션을 최소한으로 압축해 집중적으로 확보한 재고로 차를 최대한 많이, 빨리 생산할 수 있도록 만든 일종의 고육책이다.
도요타는 이렇게 '옵션 오마카세(맡김)' 시엔타에 '추천 사양차'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달 발매하는 고급 세단 '크라운'에도 추천 사양차 판매방식을 적용할 계획이다. 고객의 반응을 지켜본 뒤 대상 차종을 확대할 계획도 갖고 나왔다. 혼다도 부품 조달이 상대적으로 원활한 모델을 집중적으로 만들어 최대한 많이 파는 '집중 생산생산 차량'이라는 생산·판매 방식을 들고 나왔다.
이를 가능케 하는 방식이 '간판'을 사용한 생산 시스템이다. 앞 라인과 뒷 라인이 '어떤 부품을 언제, 얼마만큼 만들어서 주고받을지' 긴밀하게 소통하는 방식이다. 생산을 철저히 시장의 수요에 맞춤으로써 재고를 극단적인 수준까지 줄일 수 있다.
앞 라인(선 공정)은 슈퍼마켓, 뒷 라인(후 공정)은 소비자가 돼 부품을 그때 그때 필요한 만큼만 주고 받는다. 복잡한 자동차 생산현장에서 이 방식을 제대로 운영하려면 모든 생산라인이 서로 생산량, 생산시점, 생산순서, 운반량, 운반시기 같은 정보를 정확하게 주고 받아야 한다.
이렇게 재고를 최소화하는 방식은 도요타 뿐 아니라 일본 기업을 대표하는 생산방식이 됐다.기업이 재고를 얼마만큼 쌓아두고 있는지를 알아볼 때 '재고자산회전기간(재고자산/월평균 매출)'이라는 통계를 쓴다.
적기생산은 부품 공급이 원활할 때는 훌륭한 방식이었다. 하지만 글로벌 공급망이 단절되면서 '재고를 쌓지 않는 경영'의 부작용이 속출했다. 코로나의 충격에서 급속히 회복하는 세계 시장의 수요를 일본 제조업의 생산상황이 쫓아가지 못하는 것이다.
일본 제조업 전체의 재고 역시 2020년 1분기보다 31% 증가했다. 특히 자동차와 정보통신(IT) 기계·전자부품 업종이 작년 봄 이후 재고 확보를 서두른 것으로 나타났다.
발빠른 일본 기업들이 내놓은 대응전략이 글로벌 생산 체제를 중국과 중국 이외의 지역으로 이분화하는 블록화 전략이다. 세계화의 시대에 1개 였던 생산체계를 미국 등 서방국가용과 중국 등 패권주의 국가용의 2개로 분리해서 운영하는 것이다.
핵심 전자부품인 적층세라믹커패시터(MLCC) 세계 1위 무라타제작소와 일본 최대 공조회사 다이킨공업 등이 이미 제품 생산체계를 이원화하기로 했다.
일본 대표 산업인 자동차 업계도 블록화 전략에 나섰다. 산케이신문은 지난달 25일 일본 2위 자동차 업체 혼다가 전세계 공급망 체계에서 중국을 별도로 분리하는 작업을 시작했다고 보도했다. 중국에 의존하던 부품 공급을 동남아시아와 인도, 북미 지역에 위치한 생산거점으로 대체해 별도의 독자적인 생산체제를 만드는 것이 핵심이다.
혼다가 지난해 생산한 자동차 414만대 가운데 일본에서 생산된 차량은 63만대로 전체의 15.2%에 불과했다. 나머지 350만대는 해외공장에서 생산됐다. 이 가운데 중국 생산량이 162만대로 전체의 38.8%에 달했다. 미국(83만대)의 두 배다. 부품 역시 차종에 따라 적게는 10%, 많게는 절반 가량의 부품을 중국에 의존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도쿄=정영효 특파원 hug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