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처럼 그려낸 '왕실의 일상'…서양미술사서 가장 많이 연구된 걸작

이명옥의 명작 유레카
스페인 프라도미술관의 보물
디에고 벨라스케스 '시녀들'

스페인 국왕 펠리페 4세
알카사르 궁전 화실 배경
공주와 시녀·시종 등
당시 실존인물 11명 등장

그림 속 보이는 인물은 9명뿐?
국왕부부는 거울 속에 비쳐
공주와 한 공간 있다는 의미

절대권력자인 국왕 지위를
관객의 위치로 내려놔
피카소에게도 영감 준 작품
벨라스케스 ‘시녀들’(1656~1657) /스페인 프라도미술관 소장
프랑스 철학자 질 리포베츠키는 미술관 관객들이 감상을 위해 한 작품 앞에 머무는 시간이 불과 몇 초밖에 되지 않는다는 통계 수치를 수차례의 조사 결과로 보여줬다. 이처럼 인내심이 부족한 관객들도 17세기 스페인 화가 디에고 벨라스케스(1599~1660)의 대표작 ‘시녀들’ 앞에 서면 쉽게 눈길을 돌리지 못하게 되리라.

스페인 프라도미술관의 보물인 이 그림은 다양한 관점에서 해석이 가능한 수수께끼 같은 구성, 인물의 순간 동작 포착, 빛의 효과에 따른 오묘한 색채 변화, 입체감이 뚜렷한 사실적 표현기법, 자유롭고 대담하며 신속한 붓질, 실제와 환상 공간의 공존 등 복합적 요소가 결합돼 세상에서 가장 흥미롭고 불가사의한 그림으로 꼽힌다. 아울러 이 그림은 역사상 가장 많은 논쟁을 낳고 가장 많이 분석되고 있는 작품 중 하나이기도 하다.1656년께 작품이 세상에 선보인 이후 366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숱한 찬사가 이어졌다. 17세기 이탈리아 화가 루카 지오다노는 1692년 “회화의 신학”으로, 19세기 영국을 대표하는 초상화가 토머스 로렌스 경은 “예술의 철학”이라고 표현했다. 미국 미술사학자 조너선 브라운은 1986년 <벨라스케스: 화가와 궁정>이라는 책에서 “‘시녀들’은 서양미술사에서 가장 많이 연구된 작품 중 하나로 예술사에서 이만큼 다양한 해석을 만들어낸 그림은 거의 없다. 지금까지 그린 것 중 가장 위대한 그림”이라고 극찬했다.
파블로 피카소 ‘시녀들’(1957)
현대미술의 황제 파블로 피카소가 이 그림에 영감을 받아 그린 작품이 무려 58점에 달한다는 사실도 ‘시녀들’이 인류역사상 가장 위대한 걸작 가운데 하나로 평가받는 데 영향을 미쳤다. 작품의 중요성과 예술적 가치, 작품 훼손 우려 때문에 그림은 스페인 밖으로 단 한번도 나간 적이 없다. 앞으로도 해외에서 전시될 계획은 없다.

작품의 배경은 펠리페 4세 스페인 국왕의 마드리드 알카사르궁전에 있는 벨라스케스의 화실이다. 왕실 가족의 일상을 마치 스냅샷을 찍듯이 정확히 포착한 그룹 초상화에는 당시 실존 인물 11명이 등장한다. 그림 중앙의 은색 공단 드레스를 입은 긴 금발머리 여자아이는 펠리페 4세와 마리아나 왕비의 딸인 마르가리타 공주. 그 주변에는 어린 왕녀를 수행하는 시녀, 왕실 소속 난쟁이, 호위병, 시종이 보인다. 화면 왼쪽의 시녀는 무릎을 꿇은 자세로 빨간색 물병을 공주에게 건네주고, 손목에 빨간 리본이 달린 공단 옷을 입은 시녀는 왕녀에게 고개를 숙이며 예의를 표하고 있다. 당시 왕실 시녀는 지체 높은 귀부인들이 맡던 영예로운 직책이었다.시녀 뒤로 공주를 돌봐주는 샤프롱(보호자)이 호위병과 대화를 나누고, 화면 오른쪽의 여자 난쟁이는 그림 밖의 누군가를 응시한다. 남자 난쟁이는 졸고 있는 개의 등에 장난스럽게 발을 얹어놓는다. 방안 깊숙한 곳의 열린 문 뒤에는 왕비의 시종이 걸음을 멈춘 순간 동작을 취한 채 관객을 바라보고 있다. 화면 왼쪽의 커다란 캔버스 앞에 서서 팔레트와 붓을 들고 작업하던 중 관객을 바라보는 남자는 이 그림을 그린 화가 벨라스케스다.

벨라스케스 ‘시녀들’ 세부. 거울에 펠리페 4세 국왕과 마리아나 왕비의 상반신이 흐릿하게 비친다.
이제 두 가지 의문이 생긴다. 11명 중 9명은 벨라스케스의 화실에 모여있는 것을 확인했는데 나머지 2명은 어디에 있을까? 또 화가는 뒷면의 일부만 보이는 대형 캔버스에 무엇을 그리고 있을까? 먼저 방안에서는 보이지 않는 2명은 공주 뒤편 벽에 걸린 사각형 거울에서 그 모습을 찾을 수 있다. 거울에 펠리페 4세 국왕과 마리아나 왕비의 상반신이 흐릿하게 비친다. 비록 그림 속 공간에는 국왕 부부가 부재하지만 왕과 왕비는 그림 속 인물들과 이 방에 함께 있다는 뜻이다. 이것은 국왕 부부가 감상자인 우리와 같은 위치에서 우리와 같은 시선으로 방안에서 벌어지는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학자들은 절대권력자인 국왕의 지위를 감상자의 위치로 내려놨다는 점을 혁명적이라고 평가한다. 거울에 비친 이미지는 벨라스케스가 화폭에 무엇을 그리고 있었는지도 추측하게 해준다. 두 가지 가설이 있다. 먼저 화가는 캔버스에 국왕 부부의 초상화를 그리고 있었는데 공주가 수행원들과 함께 작업 중인 벨라스케스의 화실을 방문해 그 일행들이 모델이 된 왕과 왕비를 바라보고 있다. 다음으로 벨라스케스가 화폭에 공주를 그리던 중 국왕 부부가 궁정화가의 화실을 방문해 일행들이 순간 멈춤 동작을 취한 채 국왕 부부를 응시하고 있다.

이 그림을 더 흥미롭게 만드는 진정한 미스터리는 그림 속 인물들의 시선과 감상자인 관객의 시선이다. 등장인물들은 화면 밖에 있는 관객을 응시하고 관객은 그림 속 인물들의 행동을 지켜본다. 그림 속 등장인물과 화면 밖에 존재하는 관객과의 상호 교감, 스냅 사진을 예고한 순간 장면 포착, 그림 속 세계와 현실 세계가 공존하는 천재적인 조합은 이 작품이 수백 년 동안 관객의 의식을 사로잡은 결정적 요소가 됐다.

오는 10월 25일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개막하는 ‘합스부르크 600년, 매혹의 걸작들-빈미술사박물관 특별전’은 벨라스케스의 걸작들을 한국에서 직접 볼 기회다. ‘흰옷을 입은 마르가리타 테레사의 초상’을 비롯한 대표 명작들을 만날 수 있다.

이명옥 사비나미술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