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미술 대들보' 선화랑이 낳은 작가 한자리에

'인사동 터줏대감'…45주년 기념전 '달의 마음, 해의 마음'

약사 출신 컬렉터 故 김창실 회장
1977년 선화랑 세운 '화랑계 대모'
미술잡지 내고 작가상 제정해
한국 현대미술 발전에 큰 역할

12일까지 기념전 개최
윤진섭 평론가, 金 회장과 인연 맺은
이석주·김강용·문형태·정복수 등
51명 작가 작품 100여점 전시
이이남 ‘기운생동II'(2022)
선화랑은 한국 현대미술을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갤러리다. 선화랑이 1979년부터 13년간 펴낸 계간지 ‘선미술’과 1984년부터 2010년까지 시상한 작가상 ‘선미술상’만 봐도 그렇다. 선미술은 당시 미술인들의 필독 잡지였고, 선미술상을 받은 황창배·김영원·서도호·이이남 등은 이후 한국 미술계의 대들보로 성장했다. 미술관이 아닌 상업화랑이 잡지와 상을 만들고, 그 권위도 인정받은 건 선화랑밖에 없다.

이런 선화랑의 45년 역사를 한눈에 담을 수 있는 전시가 열리고 있다. 제목은 ‘달의 마음, 해의 마음’. 설립자인 고(故) 김창실 회장(1935~2011)의 자서전 <달도 따고 해도 따리라>에서 따왔다. 한국미술평론가협회장과 국제미술평론가협회 부회장을 지낸 윤진섭 평론가가 선화랑과 인연이 깊은 화가들을 중심으로 51명의 작품 총 100여 점을 골랐다.

선화랑 45년, 한국 현대미술 45년

선화랑은 단순한 갤러리를 넘어 한국 현대미술계에서 ‘맏형’ 역할을 해왔다. 김 회장의 한국미술에 대한 사랑이 그만큼 깊었기 때문이다. 약사이자 저명한 컬렉터였던 그는 1977년 서울 인사동에 선화랑을 세웠다. 탁월한 안목과 열정, 카리스마는 김 회장을 ‘화랑계의 대모’ 자리로 올려놨다. 그는 한국화랑협회장을 두 번이나 지냈고, 현직 화랑 오너 중 처음으로 문화훈장(옥관)도 받았다. 2011년 타계한 뒤 경영 바통은 며느리 원혜경 대표(63)가 물려받았다.

이번 전시는 2대에 걸친 선화랑의 45년 역사를 돌아보는 기념 전시다. 윤 평론가는 “1977년 이건용, 성능경 등 훗날 거장이 된 작가들과 함께 전시 장소를 찾다가 김 회장을 처음 만났다”며 “선화랑은 인사동에 상업화랑이 10여 곳밖에 없던 그때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작가를 키워냈다”고 회고했다.

김영원 ‘Cosmic force D20-42'(2020)
전시는 ①사실주의적 경향 ②단색화적 경향 ③미니멀 추상 혹은 물질에 대한 관심 ④미디어아트 ⑤정감적 접근과 색의 표현성이라는 다섯 가지 주제를 중심으로 꾸렸다. 윤 평론가가 꼽은 1970년대 이후 한국 현대미술의 5대 흐름이다. ‘사실주의적 경향’에서는 1970년대부터 극사실주의 그림을 그려온 김강용(벽돌 그림)과 이석주(책 그림), 고전 명화를 패러디하는 한만영과 자연 풍경을 그리는 주태석 등 원로 작가들의 그림이 주를 이룬다.

‘단색화적 경향’은 박서보 하종현 등 전기 단색화가들을 건너뛰고 후기 단색화가들을 중심으로 구성했다. 후기 단색화의 대표 주자로 꼽히는 장승택과 독창적 단색화풍을 개척한 이정지 등의 작품이 걸렸다. ‘미니멀 추상 혹은 물질에 대한 관심’에서는 ‘광화문 세종대왕상’을 만든 조각가 김영원의 추상화를 비롯해 김지아나(흙) 이길우(향불) 등 독특한 재료를 활용하는 작가들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미래 바라보며 작가 발굴할 것”

김 회장의 타계를 한 해 앞둔 2010년을 마지막으로 선미술상은 막을 내렸다. 그 마지막 수상자가 세계적인 미디어아트 작가로 평가받는 이이남이다. 당시만 해도 국내에 미디어아트는 생소한 분야였다. 하지만 “세계 미술의 최신 조류를 알아야 한국 미술의 미래가 있다”는 김 회장의 지론이 반영돼 이례적으로 미디어아트 부문에서 수상자를 냈다. 이런 인연을 담아 이이남의 ‘기운생동’이 이번 전시 ‘미디어아트’ 분야의 대표 작품으로 나왔다. 모준석의 대체불가능토큰(NFT) 영상 작품 등 최신 기술을 사용한 실험적인 작품들도 함께 걸렸다.‘정감적 접근과 색의 표현성’에는 김명식과 석철주, 황주리와 김길후 등 한 가지 주제로 분류하기 어려운 다양한 화풍의 작가 작품들이 걸렸다. 지난해 경매 낙찰률 99.34%(전체 2위)를 기록한 ‘라이징 스타’ 문형태, 동양화가 이영지 등도 눈길을 끈다.

윤 평론가는 “명동화랑, 문헌화랑 등 1970년대 문을 연 수많은 1세대 화랑들이 세월에 적응하지 못하고 사라졌다”며 “선화랑 역시 예전보다는 명성이 약해진 게 사실”이라고 했다. 최근 미술시장 주축으로 떠오른 20~30대는 한국 작가보다 해외 작가를, 개인 갤러리보다 경매를 통해 구입하는 것을 선호한다. ‘문화 중심지’도 인사동에서 삼청동·한남동·강남으로 옮겨 간 지 오래다. 인사동에서 국내 미술품을 다루는 선화랑에는 불리한 변화다.

윤 평론가는 “시대가 변해도 좋은 작가를 키우고 함께 성장하는 화랑은 살아남는다”고 했다. 원 대표는 “선대 회장이 그랬듯이 앞으로도 유망 작가들을 발굴하는 데 힘쓰겠다”고 했다. 전시는 오는 12일까지.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