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권보수당 집단 반란에…'감세안 고수' 英내각, 결국 백기

금융시장 혼란, 지지율 곧두박질…글로벌 후폭풍 속 열흘만 180도 '급선회'
'사면초가' 트러스, 유턴했지만 타격 불가피…조기 레임덕 가능성
대대적 감세안을 내놨던 영국 리즈 트러스 신임 내각이 글로벌 금융시장 혼란과 자국 정치권의 거센 반발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백기를 들었다. 정책 발표 열흘만인 3일(현지시간) '부자 감세' 논란의 핵심이었던 소득세 최고세율안을 전격 철회, 기존 방침에서 180도 선회한 것이다.

그러나 이번 사태를 거치며 국제사회에 영국 경제의 재정적 리스크 요인만 그대로 노출했다는 비판이 이어지고 있다.

더욱이 감세안 논란 속에 집권당인 보수당의 지지율이 곤두박질친데다, 여당 내에서조차 비난 목소리가 비등하면서 취임 초 야심차게 제2의 '마거릿 대처'를 표방했던 트러스 총리가 조기 레임덕 국면으로 빠져들 수 있다는 전망이 제기되는 등 후폭풍은 지속될 전망이다.
◇ 파운드화 가치 '사상 최저치' 급락에 채권시당 요동…거센 글로벌 역풍
일단 국제사회에서는 트러스 내각이 금융시장의 충격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성급히 정책을 발표하는 악수를 뒀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트러스 총리 취임 직후인 지난달 23일 쿼지 콰텡 재무장관은 소득세와 인지세를 인하하는 450억 파운드(약 70조 원) 규모의 감세 정책과 600억 파운드(약 94조 원) 상당의 에너지 보조금 지원 방안 등 경기부양책을 공개한 바 있다.

특히 소득세 최고세율 45% 구간을 폐지하는 등 경제 성장 촉진을 위해 고소득층 세부담 감면으로 '낙수 효과'(trickle-down)를 노리는 경제 정책으로 분석됐다. 하지만 정부는 50년 만에 최대 규모의 감세로 부족해질 세수를 어떻게 메울 것인지 등 지출 삭감 계획을 전혀 밝히지 않았다.

영국 금융가에서는 즉각 "자금 조달방안이 없는 광범위한 감세 정책은 부채 부담을 가중할 것"이라는 비판이 나왔고, 결국 국채 발행으로 영국이 빚더미에 오를 것이라는 비관론이 확산하며 금융시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금융서비스회사 이베리의 매슈 라이언 시장전략 담당은 이번 방안의 재정지출이 향후 2년간 2천억 파운드(약 317조원)를 웃돌 것으로 추산하기도 했다. 지난 26일 한때 영국 파운드화의 미국 달러 대비 환율이 사상 최저 수준인 1.03달러로 급락했고, 영국 국채 금리도 2거래일만에 1%포인트 넘게 급등하는 등 시장은 그야말로 '패닉' 상태에 빠져들었다.

30일에는 급기야 국제신용평가사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가 영국의 국가신용등급 전망을 '안정적'에서 '부정적'으로 하향 조정했다.

AP 통신은 "영국은행이 결국 채권시장 안정을 위해 개입하게 됐고, 은행이 곧 금리인상을 단행할 것이라는 공포감으로 인해 주택담보대출을 받은 이들이 큰 혼란에 빠졌다"고 꼬집었다.

거센 후폭풍에도 감세안 추진을 고집하던 트러스 총리는 지난 30일 정부 재정건전성 감시기구인 예산책임처(OBR)의 리처드 휴스 처장과 긴급 회동하고 대응 방안을 모색했으나, 결국 정책을 철회하기에 이르렀다.
◇ 자당 의원들마저 등돌려…감세안 부결 가능성 속 "보수당 반란에 항복"
이날 영국 일간 가디언은 "많은 보수당 의원들의 반대로 이 정책이 의회에서 부결될 수 있다는 사실을 총리실이 깨달았다"며 "토리당(보수당)의 반란으로 트러스 총리가 최고세율 45% 폐지안을 포기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표심 이탈 등 정치적 후폭풍을 우려한 '친정' 집권여당 마저 등을 돌리며 결국 백기를 들었다는 것이다.

트러스 총리가 이번 논란 국면을 거치며 심대한 정치적 타격을 자초했다는 시각이 반영된 표현이다.

감세안 발표 직후부터 소득세율 45% 구간 폐지 방안을 두고 "부자 감세"라는 비난이 들끓었으나, 정치적 순발력이나 정책적 유연성을 발휘해 위기를 타개하는 데에 실패했다는 점에서다.

CNN 방송도 트러스와 콰텡의 전직 장관 동료들이 지난 주말 사이 감세안 비판에 가세했고, 보수당내 보다 광범위한 반란의 조짐이 있었다고 유턴 배경을 전했다.

이날 정책 급선회는 그야야말로 전격적으로 이뤄졌다.

AP통신에 따르면 콰텡 장관은 이날 보수당 총회에서 연설할 예정인데, 성명 발표에 앞서 유출된 그의 연설문에는 "우리는 이 노선을 지켜야 한다.

우리의 계획이 옳다고 확신한다"고 적혀있었다.

트러스 총리도 콰텡 장관이 성명을 발표하기 몇 시간 전만 해도 언론 인터뷰에서 감세 정책 발표 과정에서 의사소통에 문제가 있었다고 인정하면서도 정책 자체는 두둔했었다.

45% 세율이 적용되는 소득 구간은 영국 성인 인구의 1%가량인 50만 명에게만 해당하지만, 이들이 워낙 고소득층이라 세입 규모는 60억 파운드(약 9조6천억 원)에 달한다.

감세 정책이 공개된 직후 제1야당인 노동당의 키어 스타머 대표가 "트러스 총리가 영국 경제에 위험요인"이라고 날을 세우며 계획 철회를 요구했고. 국제통화기금(IMF)도 이례적으로 주요 7개국(G7) 국가인 영국에 경제정책 조언을 요구하고 나설 정도가 됐다.

트러스 총리가 안팎의 비판에 시달리는 사이 집권 보수당의 지지율이 추락하며 지지세력도 동요하기 시작했다.

지난달 28∼29일 실시된 유고브 설문조사에서 집권 보수당의 지지율은 21%에 그치며 12년째 야당인 노동당(54%)보다 33%포인트나 낮은 수준을 기록했다.

불과 4일 전 진행된 같은 조사(보수당 28%, 노동당 45%)에서보다 지지율 격차가 거의 두 배로 커진 것이다.

2019년 영국 총선에서 보수당에 투표했던 유권자 중에서도 "차기 총선에서도 보수당에 표를 던지겠다"는 응답이 37%에 그치자 보수당 중진인 찰스 워커 의원은 "(보수당은) 정당으로서 존재할 수 없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보수당 소속인 마이클 고브 전 주택부 장관도 45% 세율 폐지안을 두고 "잘못된 가치들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혹평했다.

특히 트러스 총리가 BBC 인터뷰에서 45% 세율 폐지안이 내각과 논의되지 않은 쿼지 콰텡 재무부 장관의 결정이라고 책임을 전가하는 듯한 발언을 하자 나딘 도리스 전 문화부 장관이 "자신의 장관을 버스 아래로 내던지나"라고 꼬집고 나서기도 했다.

자당 정치인들조차 속속 등을 돌리면서 트러스 총리의 첫 경제정책은 추진력을 완전히 잃게 된 것이다. 미국 일간 뉴욕타임스(NYT)는 이날 정책 철회 발표를 두고 "금융시장을 떠들썩하게 만들고 광범위한 비난을 초래한 트러스 총리와 영국 정부가 항복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