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과 손잡은 기업…각그랜저·프라다도 작품이 되다

울산시립미술관 특별전 '예술과 산업'

"21세기 기업 경쟁력인 상상력
극대화 하려면 예술과 만나야"

전 세계 10개국서 15개 팀 참여
현대차·SK이노·나이키 등과 협업

中미술가 양푸둥, 프라다와 협업
정연두, 현대차와 만든 車극장
차 타면 마치 영화속 주인공 된 듯
서진석 울산시립미술관장이 현대자동차의 ‘각그랜저’를 활용한 정연두 작가의 작품을 시연하고 있다. 울산=이선아 기자
짐 데이토란 미래학자가 있다. 1967년 앨빈 토플러와 함께 ‘미래학’을 개척한, 이 분야의 최고 구루다. 그런 그가 1990년대 말에 이런 얘기를 했다. “지금까지 경제성장의 동력이 정보와 기술이었다면, 앞으로는 상상력과 창조성으로 바뀔 것”이라고. 21세기엔 기업이건, 국가건 ‘글로벌 리더’가 되려면 자본·노동·기술 등 기존 성장동력만으론 부족하고, 예술과 문화가 반드시 더해져야 한다는 의미였다.

세상은 그의 예언대로 돌아갔다. 애플 스타벅스 구글처럼 상상력과 창조성으로 소비자의 마음을 사는 기업들의 세상이 됐다. 이들 기업은 핵심 경쟁력이 된 ‘상상력’을 최대치로 끌어올리기 위해 수시로 예술을 찾았다.한국을 대표하는 ‘산업 도시’에 자리잡은 울산시립미술관이 올 하반기 특별전 주제로 ‘예술과 산업’을 선택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울산에 있는 기업들이 예술과 만나 경쟁력을 한껏 끌어올리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6일부터 자동차(현대자동차 아우디 포드), 에너지·화학(SK이노베이션), 정보기술(IT·인텔), 패션(프라다 나이키) 등 다양한 분야의 글로벌 기업이 10개국의 15개 예술인 팀과 함께 협업한 작품을 전시한다.

○“경제성·예술성 다 잡아”

양푸둥이 프라다와 협업해 만든 '처음 맞는 봄'.
전시장에 내걸린 작품에는 두 가지 공통점이 있다. 기업과 예술가가 손을 맞잡았다는 것, 그러면서도 예술적 가치가 높다는 점이다. 서진석 관장은 “작가들이 자신의 대표작에 올릴 수 있을 정도로 수준 높은 작품만 골랐다”며 “전시 준비에 꼬박 1년이 걸린 이유”라고 했다.가장 큰 제1전시실(1454㎡)의 안방은 ‘각 그랜저’로 불리는 현대차의 1세대 그랜저가 차지했다. 누구든 자동차에 타면 그 모습이 차 문에 달린 카메라를 통해 실시간으로 대형 스크린에 뜬다. 관람객은 운전하는 자신의 모습을 스크린으로 보는 이색적인 경험을 할 수 있다. 미술관 관계자는 “관람객들에게 차 안에서 친구·연인과 보낸 ‘단란한 한때’를 떠올려보라는 의도”라며 “운전할 필요가 점차 없어지는 자율주행 시대에 추억의 각 그랜저를 다시 들고 나온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했다. 현대차는 이번 전시를 위해 수천만원을 들여 각 그랜저를 제작해 울산시립미술관에 기증했다.

‘아트 마케팅’의 대표적 성공 사례로 꼽히는 SK이노베이션의 ‘혁신의 큰 그림’도 이번 전시를 위해 서울에서 이사왔다. 이 작품은 세계적인 드로잉 아티스트 김정기 작가가 2016년 만들었다. 거대한 세계지도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SK이노베이션 자회사 SK에너지의 직원들이 울산 남구에 있는 사업장에서 원유를 정제하고, 석유제품을 수출하는 모습이 담겨 있다. 가로 5m, 세로 2m의 거대한 종이에 밑그림 하나 없이 붓펜으로 세밀하게 그려나간 김 작가의 퍼포먼스는 2016년 SK이노베이션 광고로 쓰이면서 화제를 모았다.

○상품을 예술작품으로

기존 제품을 예술작품으로 변신시키기도 한다. 아우디는 패션 디자이너 아눅 비프레히트와 손잡고 자동차 A4 모델의 헤드라이트와 주차센서로 드레스를 만들었다. 주변 움직임을 감지하면 드레스에 장착된 조명에 불이 들어온다. 중국의 대표적인 현대미술 작가 양푸둥은 프라다와 함께 현대인과 과거 중국 왕조시대 사람들이 시대를 초월해 만나는 내용의 영상을 제작했다. 영상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의 옷, 가방, 신발은 모두 프라다 제품이다. 전통과 동시대성의 융합이라는 패션산업 비전을 보여줬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이번 전시를 위해 울산을 찾은 해외 예술가들도 있다. 영국 듀오 아티스트 굿 와이브즈 앤 워리어즈는 울산에 2주간 머무르며 앱솔루트 보드카와 2011년 진행했던 ‘앱솔루트 블랭크’ 프로젝트를 기반으로 한 신작을 선보였다. 앱솔루트 블랭크는 보드카 병 모양의 텅 빈 대형 패널을 예술가들의 회화·드로잉으로 채워 넣는 프로젝트다. 틀에 박힌 사고에서 벗어나 마음 가는 대로 도전하라는 의미를 담았다. 당시 높이 6m의 빈 앱솔루트 병을 꽃으로 꾸몄던 이들은 이번엔 조선시대 궁궐의 단청을 연상시키는 무늬와 무궁화, 단풍잎 등으로 병을 채웠다. 전시는 내년 1월 29일까지.

울산=이선아 기자 sun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