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말할 수 없는 비밀' 속 피아노 배틀 음악은[김희경의 영화로운 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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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예술고등학교 남학생들이 두 대의 피아노를 놓고 연주 배틀을 벌입니다. 한 명은 전학생 상륜(주걸륜 분)이며, 상대는 그 학교에서 피아노를 가장 잘 치는 상륜의 선배입니다. 두 사람은 아직 고등학생이지만 뛰어난 연주 실력을 뽐냅니다. 연주 배틀의 곡 대부분은 '피아노의 시인'으로 불리는 폴란드 출신의 음악가 프레데리크 프랑수아 쇼팽(1810~1849)의 작품인데요. 두 사람은 쇼팽의 에튀드(연주기교 연습용으로 작곡한 곡) 5번 '흑건', 왈츠 7번 등을 연이어 연주합니다. 피아노에 천부적인 소질을 가진 상륜은 현란한 연주 솜씨로 선배를 압도합니다. 구경을 하던 다른 학생들도 크게 감탄하죠. 대만 배우 주걸륜이 직접 연출하고 연기한 영화 '말할 수 없는 비밀'(2008)에서 가장 유명한 장면입니다. 영화는 피아노 천재 상륜과 비밀스러운 소녀 샤오위(계륜미)가 시공간을 초월해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개봉 당시 이들의 풋풋하면서도 가슴 아픈 사랑에 많은 관객들이 눈시울을 붉혔습니다.
스토리뿐만 아니라 작품 속 피아노 연주 장면들 덕분에 인기가 높았습니다. 특히 피아노 배틀 장면은 패러디가 수없이 나올 만큼 좋은 반응을 얻었습니다. 영화를 본 후 이 장면에 나온 음악들을 찾아 듣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그 음악들의 주인공인 쇼팽의 삶은 피아노 그 자체였습니다. 그는 39년에 불과한 짧은 인생에서 200여 곡에 달하는 작품을 남겼는데요. 대부분은 피아노 곡입니다.
그런데 관객들 중엔 영화의 피아노 배틀 장면에서 쇼팽의 음악을 듣고 꽤 놀란 경우가 많았습니다. 쇼팽의 음악이 서정적이기만 한 줄 알았는데, 굉장히 화려하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죠. 아마도 '피아노의 시인'이란 타이틀의 영향이 큰 것 같습니다.
하지만 실제 쇼팽의 음악은 생각보다 과감하고 극적입니다. '흑건' '즉흥 환상곡'을 들으면 화려함에 빠져들게 됩니다. 19곡의 왈츠에도 다양한 기교들이 녹아 있습니다.
음악과 달리 그의 성격은 많이 내성적이었습니다. 조용하고 수줍음이 많았죠. 그런 쇼팽이 열정적으로 사랑했던 여인이 있습니다. 프랑스 소설가 조르주 상드입니다. 두 사람의 사랑 이야기도 잘 알려져 있죠.
상드는 쇼팽보다 6살 연상으로 두 아이가 있는 이혼녀였습니다. 다른 예술가들과 많은 스캔들을 일으킬 정도로 자유분방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언제 어디서나 당당하고 주체적인 여성이었습니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건 1836년 피아니스트 프란츠 리스트의 연인이었던 마리 다구 백작부인의 살롱에서였습니다. 이 살롱엔 리스트를 포함해 들라크루아, 베를리오즈 등 당대 최고의 예술가들이 모여들었죠. 쇼팽은 이 모임에 참가는 했지만, 주로 조용히 자리를 지키는 편이었습니다.
상드는 살롱에서 자신과 정반대 성격의 쇼팽을 발견하고 빠져들었습니다. 반면 쇼팽은 상드의 강한 성격 탓에 처음엔 별로 좋은 인상을 받지 못했죠. 하지만 두 사람은 이내 깊이 사랑하게 됐고, 10년간 연인으로 지냈습니다. '빗방울 전주곡'엔 이들의 사랑이 가득 담겨 있습니다. 상드가 시내에 나간 어느 날 엄청난 폭우가 쏟아졌습니다. 상드는 우여곡절 끝에 6시간 넘게 걸어 집으로 돌아왔는데요. 쇼팽은 걱정스러운 마음에 안절부절 하다가 빗방울 전주곡을 만들었습니다. 상드가 도착했을 때 쇼팽은 울며 이 곡을 연주하고 있었다고 하죠.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죽은 줄 알았어. 죽은 줄···."
하지만 애틋한 두 사람의 사랑도 결국 끝이 났습니다. 상드는 갑자기 그에게 이별 통보를 했고, 쇼팽은 이로 인해 오랜 시간 정신적 고통에 시달렸습니다. 그리고 2년 후 쇼팽은 상드를 그리워하다 결핵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영화에도 두 사람의 사랑 이야기가 나옵니다. 샤오위는 상륜에게 상드의 초상화를 보여주며 "쇼팽이 가장 사랑했던 여자야. 두 사람은 10년을 함께 했지"라고 합니다. 그러자 상륜은 "결국엔 헤어졌잖아"라고 답하죠.
하지만 샤오위는 상륜을 지그시 바라보며 이렇게 말합니다. "하지만 10년도 충분히 긴 시간이야." 이뤄지기 힘든 상륜과 샤오위의 사랑, 그럼에도 그 또한 충분히 의미있음을 비유한 장면입니다. 영원할 것만 같은 사랑. 하지만 그 사랑도 언젠가는, 어떤 방식으로든 끝나기 마련입니다. 그렇다고 사랑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멈출 순 없지 않을까요. 아니, 어쩌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일 것 같습니다. 상드의 시 <상처>엔 이런 문구가 나옵니다. "꽃을 꺾기 위해서 가시에 찔리듯 사랑을 얻기 위해 내 영혼의 상처를 견뎌낸다. 상처받기 위해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 위해 상처받으므로. 사랑하라. 인생에서 좋은 것은 그것뿐이다."
김희경 기자 hk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