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스 피싱 '현금 인출책'은 유죄인가…엇갈린 판결

"범죄 완성하는 필수 역할" vs "무한대로 조달될 수 있는 일회용 도구"
전화 금융사기(보이스 피싱) 조직에 속은 피해자가 입금한 돈을 인출해 전달하는 데 가담한 피고인에 대해 1심 법원의 판단이 엇갈리는 사례가 나왔다. 판사에 따라 이런 일을 하는 이른바 '현금 인출책'이 보이스 피싱 범죄를 완성하는 핵심 역할이라는 견해와, 단순히 '도구'로 쓰였을 뿐이라는 해석이 혼재하면서다.

10일 법조계에 따르면 범행 인정 여부, 객관적 물증, 범죄 내 역할 등 상황이 유사한 두 다른 보이스 피싱 사건의 현금 인출책에게 정반대의 판결이 이뤄졌다.

서울북부지법 형사8단독 김범준 판사는 8월 컴퓨터 등 사용 사기, 전자금융거래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A(35)씨에 대해 징역 6개월의 실형을 선고했다. 보이스 피싱 조직은 여러 피해자에게 문자메시지로 자녀라고 속여 휴대전화 원격제어 프로그램을 설치하라고 한 뒤 대포통장에 돈을 이체하도록 했다.

이들에게 고용된 A씨는 지난해 3∼6월 이 조직의 일원에게 건네받은 체크카드로 총 2억7천만원가량 찾아 전달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A씨는 재판에서 "불법적인 행위인지 의심돼 인터넷 검색을 한 결과 보이스 피싱 업무에 가담하고 있다는 사실을 비로소 알게 됐다"며 "피해자들에 대한 편취의 고의가 없었다"고 주장했다. 재판부는 "피고인이 반드시 보이스 피싱 범행의 실체와 전모를 전체적으로 파악해야만 보이스 피싱 가담 범죄가 성립한다고 볼 수 없다"며 A씨의 변론을 기각했다.

이어 "보이스 피싱 범죄는 공범들이 개별적·조직적으로 연결되어 전체 범죄를 완성하는 구조로, 어느 한 역할이 제대로 수행되지 않으면 범행의 성공을 기대하기 어렵다"며 "A씨는 현금 인출책 역할을 담당했고, 이는 보이스 피싱 범죄의 완성과 이익 실현을 위해 필수적인 역할"이라며 유죄를 선고했다.

또 A씨가 동종 범죄 전력이 있으며 조직원들과 나눈 메시지 대화 내용 등을 통해 미필적으로나마 범행을 인식했다고 봤다.
현금 인출책을 단순 가담으로 보고 무죄를 선고한 판례도 나왔다.

서울북부지법 형사4단독 이종광 부장판사는 사기 혐의로 기소된 B(61)씨에 대해 최근 무죄를 선고했다.

B씨는 지난해 9월 보이스 피싱 조직원들과 회수금의 1%, 교통비를 받는 조건으로 단기 아르바이트를 하기로 계약하고 지시를 받아 '○○은행 직원'이라고 피해자를 속여 900만원을 전달한 혐의로 기소됐다.

B씨는 법정에서 "내가 한 일이 보이스 피싱인 줄 몰랐다"며 고의성을 부인했다.

재판부는 "'피싱 사기 범죄에서 '엄격한 증명의 원칙'과 '의심스러울 때는 피고인에게 유리하게 원칙'이 고수되어야 하는 이유"라는 설명과 함께 2019년 12월 이형주 부장판사가 당시 서울동부지법에서 내렸던 판결문을 인용했다.

재판부는 인용문을 통해 "행동책은 아르바이트 시장에서 무한대로 조달될 수 있는 '일회용 도구'에 불과하다"며 "(계좌) 지급이 정지되면 미련 없이 버리면 되는 '대포계좌'와 같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잠재적 행동책에 대한 엄한 처벌은 범죄예방 효과가 없다"며 "과도한 처벌로써 피해자 보호와 사회 방위를 다 하고 있다는 생각은 실태에 무지한 자아도취이고, 보이스 피싱 사건이 전혀 줄지 않는 현 상황을 오히려 고착화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동종전과가 있었던 A씨와 달리 B씨가 범행이 1회에 그친 점, 외국 생활을 오래 한 점 등도 무죄 선고에 참작됐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