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주에게 물려줄 아버지 고사성어] 다친 게 아니면 네 다리로 걸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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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경닷컴 더 라이피스트학교 운동장에서 줄달음치다 철봉에 이마를 부딪쳐 뒤로 넘어졌다. 초등학교 3학년 때다. 이마에서 뜨끈한 게 얼굴을 타고 흘렀다. 바로 일어서긴 했지만, 친구들이 소리쳤다. 피범벅이 된 내 얼굴을 보고서다. 덩치 큰 친구가 나를 업고 집으로 내달렸다. 그제야 통증이 밀려와 울음이 났다. 따라 울던 아이들이 번갈아 가며 업었다. 소식이 먼저 갔다. 대문 앞에서 아버지가 업혀 온 나를 내려놓으라 하고 피 흐르는 상처를 뜯어 봤다. 아버지는 바로 내 뺨을 후려갈기면서 큰소리로 야단쳤다. “칠칠치 못한 놈, 이런 거로 업혀 다녀? 걸을 수 있으면 네 다리로 걸어갔다 와라!” 놀란 나는 학교까지 걸어갔다가 다시 왔다. 친구들도 수군대며 따라 걸었다.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을 눕히고 뜨거운 물수건으로 상처를 닦은 뒤 마취도 하지 않은 채 상처를 실로 꿰맸다.
상처는 쉬이 아물었지만, 기억은 오래간다. 이마 왼쪽에 상처 났던 부위는 60년이 흘러도 만지면 아리고 추울 땐 유독 시리다. 당신이 쓰던 바늘과 실로 자식의 상처를 꿰매는 그 날의 충격을 본 어머니의 기억은 더 오래갔다. 툭하면 내 이마를 만졌다. 몇 년 지난 어느 날에도 어머니가 “당신이 의사예요?”라고 그날을 떠올리며 힐문했다. 답을 하지 않은 아버지는 방에 걸린 관우(關羽) 장군의 괄골요독(刮骨療毒) 족자를 내게 가리키며 그림을 설명했다. 그림은 관우가 적군이 쏜 독화살로 입은 어깨 상처를 수술받는 장면이다. 관우가 독이 퍼져 뼈를 긁어내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마량(馬良)과 바둑을 두는 모습이다. 아버지는 “진정한 사내의 모습은 저렇게 나무기둥처럼 흔들림이 없어야 한다”고 역설하셨다.그날 아버지가 일러준 고사성어가 ‘종용유상(從容有常)’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얼굴색과 행동이 변하지 않고 소신대로 정도(正道)를 걷는다’라는 말이다. 아버지는 “떠들지 않고 얌전하다는 우리말 ‘조용’은 이 ‘종용’에서 나온 말이다. 늘 변하지 않는 얼굴색(顔色)을 지녀야 한다”고 하셨다. 변하지 않는 모습에서 믿음이 싹트고 그 믿음이 있어야 다른 이들이 너에게 기댄다는 말씀도 덧붙였다. 그때부터 종용유상은 내 안에 들어왔다.
얼마 전 저 고사성어가 문득 떠올라 어머니께 여쭙자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는 수도 없이 많이 들으셨다고 했다. 아버지는 당신의 군대 얘기는 자식들에게 일절 안 하셨다. 어머니께 들은 아버지의 전상(戰傷)을 입은 얘기는 듣기조차 참혹했다. “결혼하고 바로 군대 가셨지. 적군 폭격으로 파편이 발에 맞았으나 전우들 시신 밑에 깔려 있어 혼자만 살아남았대. 사흘 동안 밤에만 산을 기어 내려오느라 상처가 덧나 병원에서 끝내 다리를 잘라냈다더라.” 상처는 아물었지만, 통증은 평생 시도 때도 없이 터졌다. 아플 땐 참지 못해 물건을 던지거나 살림을 부수곤 해 따라 울기도 하고 화도 났다고 했다. 그러나 밖에서는 절대 내색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때마다 아버지는 주문처럼 저 고사성어를 되뇌었다고 했다.
며칠 전 우편으로 도착한 아버지 병역기록이 또렷하게 알려줬다. 아버지는 국군 2사단과 미 7사단이 중공군 45사단과 29사단에 대응해 강원도 김화군에서 치러진 고지전(高地戰), 저격능선(狙擊稜線) 전투에 참여했다. 2사단 31연대에 소속된 아버지는 전투에 투입된 지 6일 만에 포탄에 맞는 상처를 입고 병원으로 후송됐다. 오른쪽 다리 18cm만 남긴 대퇴부(大腿部) 절단은 병상일지에 정자로 적혀있다. 전사(戰史)는 아버지가 병원으로 전출된 다음 날 6주간 42회나 치른 치열했던 전투가 종결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아버지 말씀이 기억난다. “종용유상은 남에 대한 배려다. 감정을 억눌러 얼굴에 나타내지 않아야 하는 고통이 따른다.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는 자기희생은 가치 있다. 그래서 지켜내기 만만찮다”고 의미를 두셨다. 지키기 어려운 이유는 굳센 의지에서 나오는 용기, 의연(毅然)함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뛰어난 자기 조절력에서 나오는 의연함은 연습하지 않고는 얻을 수 없는 중요한 품성이다.
<한경닷컴 The Lifeist> 조성권 국민대 경영대학원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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