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무용단 '무용극 호동'…"전쟁광기에 무너지는 호동 왕자 비극 그렸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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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뷰 - 국립무용단 창단 60주년 기념작 '무용극 호동'마흔네 명의 무용수가 모두 새하얀 셔츠를 걸치듯 입고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 4층 연습실에 도열했다. 이들은 국악과 양악이 뒤섞인 전자음악 리듬에 맞춰 같은 몸짓으로 움직였다. 마치 군대 제식 훈련처럼 일사불란하게 춤추다가 제각기 몸부림에 가까운 격정적인 동작을 펼쳐냈다. 중간에 벗은 셔츠를 소품 삼아 무예 같은 몸놀림도 보여줬다.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호동 설화
뮤지컬 연출가 이지나 첫 무용극
낙랑공주와의 사랑 서사 벗어나
집단 광기와 대립하는 개인 초점
27~29일 국립극장 해오름
정소연·송지영·송설 공동안무
44명의 무용수 모두가 '호동'
"미래 무용극의 주춧돌 될 것"
강렬하고 역동적인 에너지가 넘치는 군무는 국립무용단이 지난 11일 시연회에서 보여준 ‘2022 무용극 호동’의 1장 ‘나’ 장면이다. 제작진에 따르면 ‘나’의 춤은 송범 초대 국립무용단장(1926~2007)이 호동 설화를 소재로 만든 무용극 ‘왕자 호동’(1974)과 ‘그 하늘 그 북소리’(1990)에 나오는 ‘청룡춤’을 오마주(작가를 존경하는 표시로 작품의 특정 장면을 인용하는 것)했다.다만 춤의 의도와 주제는 다르다. 화려한 용 모양 장식을 매달고 추는 ‘청룡춤’이 군사들의 용맹과 기개를 표현했다면 ‘나’의 춤은 호동의 내면에서 위압적인 집단과 맞서 힘겨운 싸움을 벌이는 개인의 모습을 나타낸다. 마흔네 명의 무용수는 모두가 ‘나’, 즉 ‘호동’이다.
‘2022 무용극 호동’은 국립무용단이 올해로 창단 60주년을 맞아 제작한 신작이다. 오는 27~29일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 해오름극장 무대에 오른다. 뮤지컬 ‘광화문 연가’ ‘서편제’ ‘잃어버린 얼굴 1895’ 등을 연출한 이지나가 대본·연출을, 국립무용단 단원들인 정소연 송지영 송설이 함께 안무를 맡았다.
작품은 삼국사기에 기록된 호동 설화를 현대적으로 새롭게 해석했다. 고구려 대무신왕의 왕자 호동에 관한 이야기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호동이 사랑에 빠진 낙랑공주에게 나라를 지키는 자명고를 찢게 해 고구려가 낙랑을 멸망시키지만 결국 공주는 죽음을 맞는 이야기와 대무신왕 왕비인 원비가 호동을 시기해 왕에게 참소하고 이를 비관한 호동이 자살하는 이야기다.대본을 쓴 이지나는 호동의 자결을 집단과 개인의 갈등에서 비롯된 것으로 재해석했다. 그는 “영토 확장을 위한 전쟁의 광기가 지배하는 집단 속에서 평화를 추구한 호동의 내면이 피폐해지는 과정을 통해 사회의 통제와 개인의 의지가 부딪치는 현대 사회에 의미 있는 메시지를 전할 것”이라고 말했다.
총 8장으로 구성된 이 작품은 호동과 낙랑공주의 사랑에 중점을 둔 서사 위주의 이전 무용극과는 달리 장별로 상징적인 표현을 통해 호동의 내면을 드러내는 형태로 진행된다. 자명고도 낙랑국의 위험을 알리는 북의 모습이 아니라 호동에게 감정의 위태로움을 경고하는 상징적인 이미지로 표출된다.
부족한 서사는 대무신왕 역을 맡은 배우 지현준의 내레이션과 자막 등을 통해 보완한다. 이지나는 “한국 무용은 움직임이 추상적인 현대무용과 비슷해 이야기를 사실적으로 전달하는 데 적합하지 않았다”며 “춤으로 상징적인 메시지를 드러내고, 대사와 자막, 음악을 합쳐 이야기를 전달하겠다”고 설명했다.무대와 의상도 상징적이고 현대적이다. 호동과 대립하는 냉혹한 집단의 이미지를 차가운 느낌의 금속 구조물과 LED(발광다이오드) 벽체로 드러낸다. 무용수들은 시연 때 입은 셔츠 대신 모두 몸에 착 달라붙는 흰 재킷을 입고 무대에 오른다. 손인영 국립무용단 예술감독은 “전통춤 기반의 무용극은 국립무용단만의 독특한 형식으로 다양한 시도를 통해 새롭게 발전시켜야 한다”며 “이번 작품은 미래의 무용극을 향한 주춧돌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송태형 문화선임기자 toughlb@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