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박 환경규제 강화 한 목소리 내는 中·日, 조선업 역전 포석일까 [황정환의 레드북]

◎ 경제 분야에서 빨간색(레드)은 다양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증권 시장에선 '상승'의 색이지만 경제에 부정적인 사건이 터졌을 때 '빨간 불이 켜졌다'고도 합니다. 그럼에도 공통점이 있다면 좋은 쪽이든 아니든 무언가 주목해야 할 '변화'가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레드북에선 미래 한국 경제에 영향을 끼칠, 우리가 주목해야 할 변화를 추적합니다.
영국 런던에서 열리는 유엔 산하 국제해사기구(IMO) 해양환경보호위원회(MEPC) 회의 모습. IMO 홈페이지
‘신냉전’ 시대가 도래했다는 말까지 나오는 요즘 아시아에서 중국과 일본은 완전한 대척점에 서 있습니다. 지난 달 29일 두 나라는 국교 정상화 50주년을 맞았지만 분위기는 냉랭했습니다. 두 나라는 센가쿠(중국명 댜오위다오) 열도를 놓고 오랜 영토 분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여기에 중국을 글로벌 공급망에서 고립시키려는 미국의 의도가 담겨 있다는 평가를 받는 ‘인도태평양 경제 프레임워크(IPEF)’ 일본 정부가 주도적으로 참여하면서 두 나라 간의 관계는 악화일로를 걷고 있습니다.이런 두 나라가 ‘공동 전선’을 구축한 분야가 있습니다. 바로 선박에 대한 글로벌 환경 규제 분야입니다.

해양수산부에 따르면 유엔 산하 국제해사기구(IMO)는 올해 12월과 내년 상반기 두 차례의 해양환경보호위원회(MEPC) 회의를 열고 선박 연료에 대해 탄소세 형태의 부담금을 부과하는 안을 확정할 계획입니다. 온실가스 배출량이 높은 연료를 쓰는 선박에는 금전적 패널티를 물리는 게 핵심으로 도입 여부는 이미 확정이 됐습니다. 내년 상반기 MEPC에서 구체적인 방식이 결정되면 이르면 2024년부터 선박연료에 대한 부담금이 선사들에 매겨집니다.

지난 6월 열린 제78차 MEPC에선 국제해운분야의 2050년 온실가스 감축 목표를 기존 2008년 대비 50%에서 그 이상으로 상향하는 방향과 그 이행 방안에 대한 논의가 이뤄졌습니다. 이미 선박의 에너지 효율성과 탄소 배출량을 일정 수준 이하로 낮출 것을 요구하는 기술적 규제인 에너지효율지수(EEXI), 탄소집약도(CII)등은 내년부터 공식 발효됩니다.지금의 이슈는 어떤 연료를 사용하는지에 따라 패널티를 부과하는 시장적 규제를 어떻게 설계할지 입니다. 해수부에 따르면 이 방식을 놓고 8개의 아이디어가 대립하고 있습니다. 중국와 일본이 이례적으로 같은 목소리를 내고 있는 영역이 바로 이 분야입니다.

먼저 그간 대세를 이루고 있었던 것은 연료의 종류에 따라 부담금 수준에 차등을 두고 기준에 맞춰 선사가 부담금을 내는 방식입니다. 머스크, MSC등 글로벌 선사를 다수 보유하고 있는 유럽연합(EU)을 비롯해 미국, 한국 등 많은 나라들이 이 방식을 선호하고 있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이 방식이 가장 ‘예측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이 명확하고 예측가능한 하나의 계획을 갖고 싶어한다. (예측가능해야) 해운 산업이 더 투자할만한 산업이 된다.” 초대형 식량업체 카길의 운송 부문 책임자인 얀 딜리만이 지난달 30일 미국 뉴욕에서 열린 글로벌해양포럼(Global Maritime Forum)한 이야기는 대규모 선사를 보유한 선진국들이 이 안을 지지하는 이유를 잘 보여줍니다.한편 중국과 일본은 이보다 다소 복잡한 안을 제시했습니다. 단순히 연료 종류에 따라 부담금을 부과하는 게 아니라 선박의 에너지 효율성, 환경 효율성 자체에 따라 부담금을 부과하자는 것입니다.

아무래도 에너지 효율이 높은 선박은 최신 선박일 가능성이 크고, 최신 선박들은 탄소 배출량이 많은 벙커C유를 쓰더라도 구형 선박에 비해선 덜 씁니다. 일반 디젤 선박에 비해 탄소배출량을 15~20% 가량 줄여주는 액화천연가스(LNG) 이중연료추진선의 비중이 점점 높아지는 추세인 점을 감안하면 어떤 연료를 쓰는지에 부담금을 매기든, 선박의 에너지효율성 수준을 기준으로 매기나 비슷하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선박 자체의 특성의 기준으로 하는 안이 선사들 입장에선 더 부담스러울 수 밖에 없습니다. 연료 종류에 따른 방식은 구형 선박을 쓰더라도 벙커C유의 대체재로 개발이 이뤄지고 있는 바이오중유 활용도를 높이는 식으로 대응이 가능합니다. 굳이 연료를 바꾸지 않더라도 적어도 예측가능성이 높습니다. 반면 선박 자체에 대한 규제는 구형 선박 비중이 높은 선사에게 신형 친환경선으로 교체해야 한다는 부담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큽니다.중국과 일본은 왜 이런 안을 내놨을까요.

현 시점에서 의도를 100% 파악하긴 어렵지만 해수부는 두 국가의 행보에 국제 환경 규제를 자국 조선업 육성에 유리하게 활용하려는 의도가 담겨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규제로 해운부터 조선에 이르는 산업의 ‘판’이 흔들리는 상황을 이용해 한국에 뺐긴 고부가가치 친환경선 시장의 주도권을 가져오기 위한 포석이란 해석입니다.

익히 알려져있다시피 한·중·일 3국은 오랜 기간 조선업을 두고 경쟁 중입니다. 클락슨에 따르면 지난해 전 세계 선박 수주량 가운데 중국이 49%로 1위를 차지했고 한국이 34%, 일본이 12%로 뒤를 이었습니다.

점유율만 보면 한국이 중국에 뒤졌지만 업계를 주도하는 것은 한국입니다. 환경 규제 강화에 따라 수요가 폭증하고 있는 LNG운반선을 비롯해 이중연료추진 초대형 컨테이너선 등 고부가가치 선박 10척중 8척은 한국산입니다.

얼핏 생각으론 고부가가치 선박 시장에서 한국에 뒤쳐지고 있는 중국과 일본이 선사들의 친환경선으로 의 교체 부담을 가중시킬 안을 내놓은 게 의아해 보입니다. 중국과 일본은 2020년 국가별 선복량을 기준으로 보면 세계 시장 점유율이 각각 11% 수준으로 그리스(17%)에 이어 2~3위를 다투는 해운 대국들입니다. 특히 중국 선사들은 경쟁자인 유럽 선사에 비해 친환경선 도입 비율이 떨어지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선박의 에너지 효율성을 기준으로 부과금을 매길 경우 중국과 일본 선사들의 부담도 상당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두 국가의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두 국가 모두 선주·선사들의 자국 발주 비율이 100%에 가까울 정도로 자신들의 조선소에서 배를 만들어 쓴다는 점입니다. 자국에서 필요한 선박을 자급자족하다보니 전체 조선 수주량에서 자국이 차지하는 비중도 30~40%에 달합니다. 한국 조선소들은 이 비중이 10%대 불과합니다.

자국 발주 비율이 100%란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환경 규제가 강화돼 자국 선사가 배를 새로 사야 하는 일이 생겨도 그 수혜가 철저히 자국 조선소에 간다는 것입니다. 큰 틀에서 보면 규제 도입은 해운업에는 쓰지 않아도 됐을 비용이 증가한다는 측면에선 ‘악재’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반면 만들 배가 늘어나는 조선소에게 강화되는 환경 규제는 ‘호재’입니다.

중국이나 일본은 규제가 어떤 식으로 바뀌든 득실이 국가 안에서 돌게 됩니다. 반면 한국은 해운업은 손해를 보고 조선업은 이익을 볼 가능성이 높습니다. 자국엔 실력 좋은 조선소가 없어 한·중·일에 의존하는 EU나 미국, 대만, 싱가포르 등은 조선업 수혜는 없이 해운업이 감당해야 할 비용만 커지게 됩니다. 연료유 사용에 대한 규제 방식을 놓고 주요 해운국들 간 입장이 갈리고 있는 이유입니다.

이처럼 국제 사회의 ‘룰(규칙)’ 또는 규제를 자국에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이끄려는 치열한 ‘전쟁’이 국제 무대에서 펼쳐지고 있습니다. 보통 규제라고 하면 기업 활동을 가로막는 부정적인 느낌이 강하지만 때로 규제 도입은 새로운 산업이 만들어지고 성장하는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중국과 일본은 국제 환경 규제가 만들어내는 틈을 파고들어 한국에 뒤쳐진 친환경선 시장에서의 역전을 꾀하고 있습니다.

한국이 지금 잘 나가고 있나는 LNG이중연료추진선도 엄밀히 얘기하면 완전한 친환경선은 아닙니다. 화석연료인 천연가스를 기존에 사용하던 벙커C유와 함께 연료로 활용해 탄소배출량을 15% 정도 줄일 수 있는 수준입니다. 탄소 배출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다고 여겨지는 암모니아, 수소를 연료로 사용하는 선박 개발은 여전히 초기 단계에 머물러 있습니다.2010년대 중반 한국 조선업체들의 해양플랜트 부실 위기를 계기로 서울대 공대 교수들이 쓴 책 ‘축적의 시간’은 실패의 경험 축적을 혁신의 비결로 꼽고 있습니다. 이 책의 메시지가 오직 한국 기업에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닐 것입니다. 남들이 자국 조선소에 발주를 해주지 않으면 스스로 발주를 해서라도 건조 경험치를 채우고 있는 중국와 일본의 움직임을 주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황정환 기자 j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