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 칸딘스키, 뒤샹···, 그들의 뒤엔 그녀가 있었다[김희경의 영화로운 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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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바도르 달리, 바실리 칸딘스키, 마르셀 뒤샹, 잭슨 폴록···.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화가들입니다. 색다른 시선과 과감한 도전으로 큰 파장을 불러일으키며 미술사의 흐름 자체를 바꿔놓았죠. 그런데 이들의 작품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영화가 있습니다. 리사 아모르디노 브릴랜드 감독이 연출한 '페기 구겐하임: 아트 애딕트'(2017)입니다.
작품은 20세기 전설적인 여성 컬렉터이자 예술 후원자인 페기 구겐하임(1898~1979)의 삶을 그렸습니다. 영화에 나오는 현대미술 그림들은 모두 그가 사들인 것들이죠. 페기 컬렉션엔 100여명 화가들의 326점에 달하는 작품이 포함돼 있습니다. 이 영화는 구체적인 장르로 따지면 극영화가 아닌 다큐멘터리에 해당합니다. 하지만 그가 미술에 입문하게 된 이야기, 현대미술에 빠져 예술가들을 후원하게 된 과정, 파란만장한 인생사와 사랑 이야기는 극영화 못지않게 다이내믹하고 흥미진진합니다.
우선 작품명을 접했을 때 '구겐하임'이란 성이 익숙하게 느껴지실 겁니다. 구겐하임 재단이 운영하는 미술관들 덕분이죠. 재단은 미국 뉴욕 맨해튼의 솔로몬 구겐하임 미술관, 스페인 빌바오와 독일 베를린의 구겐하임 미술관,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페기 구겐하임 미술관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페기의 할아버지는 미국에서 광산업으로 막대한 재산을 끌어모은 마이어 구겐하임입니다. 구겐하임 집안은 이를 발판삼아 미국 사회에 지대한 영향력을 미쳤습니다. 페기의 아버지 벤자민 구겐하임도 광산업을 이어가며 활발히 활동했습니다. 그런데 벤자민은 안타깝게도 타이타닉호 침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영화 '타이타닉'에도 벤자민이 나오는데요. "신사답게 죽음을 맞이하겠다"던 노신사가 벤자민입니다. 그는 애인과 타이타닉을 타고 여행하던 중 배가 침몰하자, 애인과 하인들에게 구명보트를 양보하고 자신은 죽음을 선택했습니다.
작품은 이 같은 페기의 집안 배경을 포함해 그의 삶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깊이 파고듭니다. 보통 예술 관련 다큐멘터리는 예술가의 사후 그의 주변 인물들을 인터뷰해 이뤄진 것이 대부분입니다. 반면 이 작품에선 페기의 생생한 육성을 들을 수 있죠. 페기의 생전에 미공개로 진행했던 인터뷰를 녹음한 자료가 담겨 있는 덕분입니다.
인터뷰 자료 속 페기의 음성과 말투만 들어도 단번에 그의 자유분방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페기는 20대 초반 엄청난 부를 상속받았지만 여느 상속자들과는 다른 삶을 살았습니다. 미술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던 페기가 미술에 관심을 갖게 된 것도 한 서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였습니다. 그곳에서 책과 지식인들을 접하며 유럽 예술과 문화에 눈 뜨게 된 거죠. 페기는 이후 파리로 떠나 본격적으로 예술을 접하고 즐기기 시작했습니다. 수많은 예술가들과 만나 마음껏 사랑도 했죠. 그는 단순히 예술가와의 사랑에만 몰두하지 않았습니다.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미술을 배웠습니다. 그러다 당시 미술계를 발칵 뒤집어 놓은 인물을 만나 빠르게 성장했습니다.
상점에서 구입한 소변기에 '리처드 머트'란 가명으로 서명한 후, 이를 '샘'이라고 제목을 붙여 발표한 뒤샹입니다. 뒤샹은 기존 물건에 변형을 가하지 않고도 제목만 달아 전시하는 '레디메이드(ready made)' 개념을 제시해 미술계를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뒤샹은 페기를 만나 현대미술의 개념과 흐름 등을 알려주고, 좋은 미술 작품을 발견하고 선택할 수 있는 안목을 길러주었죠. 페기 역시 뒤샹의 든든한 후원자가 됐습니다. 그럼에도 페기가 사들인 작품들은 제대로 된 인정을 받지 못했습니다. 당시 현대미술은 늘 논란의 중심에 서 있었고, 이를 사람들에게 적극 알리려 했던 페기 역시 비판의 대상이 됐습니다. 영국의 세관은 페기가 전시하려던 작품들을 보고 "예술이 아니다"라며 통관을 거부했죠.
칸딘스키에 대한 일화도 유명합니다. 칸딘스키는 어느 날 페기에게 한 가지 부탁을 했습니다. 솔로몬이 자신의 작품을 사도록 설득해 달라고 한 거죠. 솔로몬은 페기의 숙부이자 솔로몬 구겐하임 미술관의 설립자입니다.
페기는 이를 흔쾌히 받아들여 솔로몬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하지만 솔로몬은 직접 답장을 쓰는 대신, 자신의 큐레이터인 리베이 남작부인을 통해 페기에게 이런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자신이 다루는 작품들이 쓰레기이거나 보잘것없는 것임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페기는 현대미술 작품을 끊임없이 사들였습니다. 세계 2차 대전 땐 급히 시장에 나온 작품들을 거의 하루에 한 점씩 구입하기도 했죠.
캔버스를 눕힌 채 물감을 흩뿌리는 독특한 작업 방식 때문에 논란을 불러일으킨 폴록을 후원한 것도 페기였습니다. 당시 폴록은 목수 일을 병행하며 어렵게 활동하던 무명의 화가였는데요. 페기는 그가 목수를 그만두고 작품 활동에 전념할 수 있도록 생활비까지 주며 후원했습니다. 훗날 폴록은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스타 작가가 됐죠.
대체 페기는 왜 이토록 현대미술을 알리고 후원하는 데 앞장섰던 걸까요. 페기는 그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누군가는 한 시대의 미술을 보호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이보다 훨씬 오래 전, 르네상스 시대를 활짝 열었던 메디치 가문이 떠오릅니다. 메디치 가문 사람들 중에서도 예술 후원에 적극적이었던 코시모 데 메디치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메디치 가문의 영광이 사라지는 데는 50년도 채 걸리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은 가도 예술은 남는다.” 예술의 뒤엔 늘 이들처럼 예술을 떠받치고 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메디치의 예상과 달리, 예술도 남고 사람도 남았습니다. 메디치와 페기라는 이름 모두 오늘날까지 명작들과 함께 이토록 빛나고 있으니까요.
김희경 기자 hkkim@hankyung.com
작품은 20세기 전설적인 여성 컬렉터이자 예술 후원자인 페기 구겐하임(1898~1979)의 삶을 그렸습니다. 영화에 나오는 현대미술 그림들은 모두 그가 사들인 것들이죠. 페기 컬렉션엔 100여명 화가들의 326점에 달하는 작품이 포함돼 있습니다. 이 영화는 구체적인 장르로 따지면 극영화가 아닌 다큐멘터리에 해당합니다. 하지만 그가 미술에 입문하게 된 이야기, 현대미술에 빠져 예술가들을 후원하게 된 과정, 파란만장한 인생사와 사랑 이야기는 극영화 못지않게 다이내믹하고 흥미진진합니다.
우선 작품명을 접했을 때 '구겐하임'이란 성이 익숙하게 느껴지실 겁니다. 구겐하임 재단이 운영하는 미술관들 덕분이죠. 재단은 미국 뉴욕 맨해튼의 솔로몬 구겐하임 미술관, 스페인 빌바오와 독일 베를린의 구겐하임 미술관,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페기 구겐하임 미술관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페기의 할아버지는 미국에서 광산업으로 막대한 재산을 끌어모은 마이어 구겐하임입니다. 구겐하임 집안은 이를 발판삼아 미국 사회에 지대한 영향력을 미쳤습니다. 페기의 아버지 벤자민 구겐하임도 광산업을 이어가며 활발히 활동했습니다. 그런데 벤자민은 안타깝게도 타이타닉호 침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영화 '타이타닉'에도 벤자민이 나오는데요. "신사답게 죽음을 맞이하겠다"던 노신사가 벤자민입니다. 그는 애인과 타이타닉을 타고 여행하던 중 배가 침몰하자, 애인과 하인들에게 구명보트를 양보하고 자신은 죽음을 선택했습니다.
작품은 이 같은 페기의 집안 배경을 포함해 그의 삶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깊이 파고듭니다. 보통 예술 관련 다큐멘터리는 예술가의 사후 그의 주변 인물들을 인터뷰해 이뤄진 것이 대부분입니다. 반면 이 작품에선 페기의 생생한 육성을 들을 수 있죠. 페기의 생전에 미공개로 진행했던 인터뷰를 녹음한 자료가 담겨 있는 덕분입니다.
인터뷰 자료 속 페기의 음성과 말투만 들어도 단번에 그의 자유분방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페기는 20대 초반 엄청난 부를 상속받았지만 여느 상속자들과는 다른 삶을 살았습니다. 미술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던 페기가 미술에 관심을 갖게 된 것도 한 서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였습니다. 그곳에서 책과 지식인들을 접하며 유럽 예술과 문화에 눈 뜨게 된 거죠. 페기는 이후 파리로 떠나 본격적으로 예술을 접하고 즐기기 시작했습니다. 수많은 예술가들과 만나 마음껏 사랑도 했죠. 그는 단순히 예술가와의 사랑에만 몰두하지 않았습니다.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미술을 배웠습니다. 그러다 당시 미술계를 발칵 뒤집어 놓은 인물을 만나 빠르게 성장했습니다.
상점에서 구입한 소변기에 '리처드 머트'란 가명으로 서명한 후, 이를 '샘'이라고 제목을 붙여 발표한 뒤샹입니다. 뒤샹은 기존 물건에 변형을 가하지 않고도 제목만 달아 전시하는 '레디메이드(ready made)' 개념을 제시해 미술계를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뒤샹은 페기를 만나 현대미술의 개념과 흐름 등을 알려주고, 좋은 미술 작품을 발견하고 선택할 수 있는 안목을 길러주었죠. 페기 역시 뒤샹의 든든한 후원자가 됐습니다. 그럼에도 페기가 사들인 작품들은 제대로 된 인정을 받지 못했습니다. 당시 현대미술은 늘 논란의 중심에 서 있었고, 이를 사람들에게 적극 알리려 했던 페기 역시 비판의 대상이 됐습니다. 영국의 세관은 페기가 전시하려던 작품들을 보고 "예술이 아니다"라며 통관을 거부했죠.
칸딘스키에 대한 일화도 유명합니다. 칸딘스키는 어느 날 페기에게 한 가지 부탁을 했습니다. 솔로몬이 자신의 작품을 사도록 설득해 달라고 한 거죠. 솔로몬은 페기의 숙부이자 솔로몬 구겐하임 미술관의 설립자입니다.
페기는 이를 흔쾌히 받아들여 솔로몬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하지만 솔로몬은 직접 답장을 쓰는 대신, 자신의 큐레이터인 리베이 남작부인을 통해 페기에게 이런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자신이 다루는 작품들이 쓰레기이거나 보잘것없는 것임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페기는 현대미술 작품을 끊임없이 사들였습니다. 세계 2차 대전 땐 급히 시장에 나온 작품들을 거의 하루에 한 점씩 구입하기도 했죠.
캔버스를 눕힌 채 물감을 흩뿌리는 독특한 작업 방식 때문에 논란을 불러일으킨 폴록을 후원한 것도 페기였습니다. 당시 폴록은 목수 일을 병행하며 어렵게 활동하던 무명의 화가였는데요. 페기는 그가 목수를 그만두고 작품 활동에 전념할 수 있도록 생활비까지 주며 후원했습니다. 훗날 폴록은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스타 작가가 됐죠.
대체 페기는 왜 이토록 현대미술을 알리고 후원하는 데 앞장섰던 걸까요. 페기는 그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누군가는 한 시대의 미술을 보호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이보다 훨씬 오래 전, 르네상스 시대를 활짝 열었던 메디치 가문이 떠오릅니다. 메디치 가문 사람들 중에서도 예술 후원에 적극적이었던 코시모 데 메디치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메디치 가문의 영광이 사라지는 데는 50년도 채 걸리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은 가도 예술은 남는다.” 예술의 뒤엔 늘 이들처럼 예술을 떠받치고 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메디치의 예상과 달리, 예술도 남고 사람도 남았습니다. 메디치와 페기라는 이름 모두 오늘날까지 명작들과 함께 이토록 빛나고 있으니까요.
김희경 기자 hk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