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서인 정권의 '향명배금' 정책 고집…국제질서 변화 못읽어 정묘·병자호란 자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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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S12
(114) 피할 수 있었던 조·청 전쟁‘호란’은 오랑캐(胡)가 일으킨 ‘난’이라는 뜻이다. 오랑캐는 여진족 계열인 올랑개(兀郞介) 부족을 가리키는 용어지만, 성리학자들은 야만인이라는 의미로 사용했다. 조선과 청나라(여진족) 사이에 발생한 전쟁은 1627년부터 1637년 초까지 10년간 이어졌고, 1단계 정묘호란(1627년)과 2단계 병자호란(1636~1637년)으로 구성됐다. 전쟁의 배경과 과정, 결과가 한족인 명나라와 여진족(만주)이 주도한 청나라의 흥망에 영향을 미쳤다. 예측과 예방이 가능했지만 저항 없이 항복한 우리 역사에 치욕스러운 패배를 안겨준 전쟁이기도 하다.
역사학자 관점에서 조선 시대에는 불가사의하고 수용하기 힘든 사건이 몇 번씩 발생했다. 임진왜란이 그랬고, 뒤를 이은 정묘호란, 특히 불과 9년 뒤 발생한 병자호란은 이해하기 힘들다. 이 사건에 책임질 인물들과 그들의 행적은 용서할 수 없다는 판단이다.조선의 위정자들은 왜 전쟁이 곧 발발할 것을 몰랐을까. 중국과 만주 일대에서 질서가 재편되고, 정복국가가 탄생할 때는 예외 없이 한국지역을 공격했다. ‘고수 전쟁’ ‘고당 전쟁’ ‘여요 전쟁’ ‘여원 전쟁’ ‘조청 전쟁’ ‘6·25전쟁’이 그러하다. 일본열도의 통일과 전환도 비슷했는데, ‘임진왜란’ ‘청일 전쟁’ ‘러일 전쟁’ ‘일본의 식민지화’ 등이다.
그 시대의 상황을 보면 전쟁 발발 예측은 분명했고, 중국에서는 격렬한 전쟁이 진행 중이었다. 여진족을 통일한 누르하치는 ‘후금’을 세우고, 1618년에는 요동지역의 태자하 유역인 무순을 점령하면서 대(對)명 전쟁의 신호탄을 올렸다. 위협을 감지했던 명나라는 파병된 조선군을 일부(강홍립 장군의 군대) 포함한 20만 명의 병력으로 후금을 공격했다. 하지만 명나라의 3분의 1 정도 병력을 가진 누르하치는 기마병을 활용해 사르후(薩爾滸) 전투 등에서 대승을 거뒀다. 이어 요동을 장악하면서 동서남북으로 팽창을 추진했다.
이런 국제질서의 변화를 파악하면서 조선의 위치를 이해하고 정책으로 활용한 사람은 광해군이었다. 그는 임진왜란이라는 위기상황 속에서 세자로 책봉된 뒤 분조를 이끌면서 위기 극복에 큰 공을 세운 인물이다. 서자 출신으로 선조와 서인들의 견제를 받다가 왕이 된 그는 국제적이고 실용적인 사고를 했고, 백성을 위한 현실적인 정책들을 추진했다. 1609년 ‘기유약조’를 맺어 대마도에 제한적인 무역 허가를 내주는 대신 관리권 안에 둬 배후를 안정시켰다. 더불어 경제회복에 총력을 기울이면서 서양세계와 교류하는 일본이 위협 대상에서 빠진 것을 간파했다. 또한 명나라와 후금(청나라) 사이의 치열한 갈등 속에서는 군사적으로 안전을 꾀할 수 있다고 판단한 그는 자주적인 ‘중립외교’를 펼쳤고, 실효성을 거두고 있었다.하지만 명분을 중시하며 친명적인 대다수 성리학자에게는 이 같은 정책이 반발을 샀다. 그가 인조반정으로 축출됐을 때 ‘폐모살제(廢母殺弟)’ 즉 어머니인 인목대비를 폐하고, 의붓동생인 영창대군을 죽인 부도덕이 폐위의 명분이었지만, 더 큰 이유로 제기된 것은 ‘반명(反明)’ 행위였다.
그만큼 사대부와 성리학자들은 친명적 인식을 강하게 갖고 있었다. 따라서 인조반정이 성공하면서 서인이 정권을 차지한 조선의 정책은 ‘향명배금(向明排金)’ 정책으로 변모했다. 그러자 후금은 명나라와 동맹 관계이며, 자국의 배후라는 지정학적 위치에 있는 조선을 복속시킬 필요성이 커졌다. 더구나 1622년에는 평안도 앞바다의 가도에 명나라 장수인 모문룡의 군대가 진주하면서 조선과 연합작전으로 만주를 공격할 의도가 포착됐다.
결국 정책을 변경한 후금은 1627년 1월 3만 명의 병력으로 압록강을 넘었다. 같은 달 21일에는 청천강을 건넜고, 인조는 25일 강화도로 도피했다. 큰 전투 없이 두 달 만인 3월 3일 양국은 강화 조약을 체결하고, ‘형제지맹’을 맺었다. 불평등한 조약이지만 후금이 조선을 전면전의 대상으로 삼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광해군의 판단이 옳았음을 방증한 것이다. 정묘호란은 국제질서의 흐름과 적국의 요구를 간파하지 못한 외교적 패착으로 자초한 패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