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G아트센터 서울' 물들인 조성진·래틀의 환상적 하모니 [송태형의 현장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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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곡동 LG아트센터 서울 개관공연첼로 파트가 고요하고 느릿하게 연주하는 ‘라 파~~미’(가단조 기준)에 이어 오보에, 클라리넷, 잉글리시 호른, 바순 등 목관과 첼로가 함께 빚어내는 불협화음이 묘한 긴장감을 조성합니다.
사이먼 래틀 지휘 런던 심포니 무대
조성진 ‘파가니니 주제 광시곡' 협연
압도적 사운드로 청중에게 감동 선사
소리가 반사되는 잔향은 짧은 편
‘LG아트센터 서울’의 메인 공연장인 LG시그니처홀에 공식적으로 처음 울려 퍼진 화음은 바그너의 유명한 트리스탄 코드(F-B-D#-G#)였습니다. 13일 서울 마곡동 LG아트센터 서울의 개관 공연으로 열린 ‘사이먼 래틀 &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LSO)’ 연주회 현장입니다. 객석 1300석 규모의 LG시그니처홀은 음악회 뮤지컬 연극 무용 등 다양한 장르의 공연예술을 올릴 수 있는 다목적 공연장입니다. LG아트센터가 22년간 운영했던 역삼동 공연장(1000석)보다 객석뿐 아니라 무대 면적도 넓습니다. LG아트센터는 역삼동 공연장에서 하지 못했던 대규모 클래식 음악회와 오페라 공연을 열기에 손색없는 공연장으로 설계했다고 밝혔습니다.
첫 공식 공연을 영국 출신 지휘 거장 사이먼 래틀이 이끄는 LSO와 피아니스트 조성진의 협연 무대로 한 것을 보면 앞으로 확성 장치를 쓰지 않은 클래식 음악회를 지속적으로 유치하겠다는 의지를 읽을 수 있습니다. 관건은 수준 높은 관현악 연주 감상에 저해되지 않을 만큼의 자연음향 환경을 갖췄느냐는 것입니다.
래틀과 LSO는 갓 태어난 공연장의 음향 환경을 검증이라도 하는 듯 다채롭고 폭넓은 스펙트럼의 관현악 명곡들을 선사했습니다. 첫 곡은 바그너 오페라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전주곡과 피날레 ‘사랑의 죽음’입니다. 두 주인공의 비극적인 운명을 암시하는 전주곡의 화성이 신비롭고도 불안하게 이어지다가 죽음으로 귀결되는 사랑의 관능적이면서도 찬란한 사운드가 공연장을 가득 채웠습니다.
LSO는 래틀 특유의 풍부한 표정과 감성적인 지휘에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반응하며 농밀한 사운드를 들려줬습니다.래틀과 LSO와 각별한 인연인 피아니스트 조성진이 무대에 등장합니다. 조성진은 LSO와 두 장의 협주곡 음반을 냈고, 2017년 래틀의 지휘로 베를린 필하모닉 데뷔 무대를 치르고, 아시아 투어도 함께했습니다. 협연곡은 라흐마니노프의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광시곡’입니다. 파가니니의 카프리스 24번의 주제를 변화무쌍하게 차용한 24개의 변주곡으로, 여느 협주곡 이상으로 독주와 오케스트라의 합이 잘 맞아야 하는 작품입니다.
앞서 대구(11일)와 대전(12일)에서 이 곡을 함께 연주한 조성진과 LSO는 그야말로 ‘찰떡궁합’의 호흡을 보여줬습니다. 오케스트라와 독주자는 마치 한 몸이 된 듯 정교한 하모니와 밸런스로 이 작품의 진가를 드러냈습니다.
조성진은 독주가 쉴 때 오케스트라의 소리를 경청하며 음악의 흐름을 탔고, 래틀과 수시로 눈빛을 교환하며 타이밍을 정확하게 맞췄습니다. 각 변주의 특성에 딱 어울리는 표정과 동작으로 관객을 음악으로 몰입시키는 조성진의 퍼포먼스도 인상적이었습니다.어둡고 무거운 7변주에서는 몸을 건반 위로 바짝 웅크리며 장중한 ‘진노의 날(디에스 이레)’ 주제화성을 진중하게 두드렸고, 유명한 18변주에서는 꼿꼿한 자세로 서정적인 선율의 한 음 한 음을 음미하듯 연주했습니다.
18변주에 앞선 17변주에서 감미롭지만 은근한 긴장을 불러일으키는 독주자와 오케스트라의 합주도 일품이었습니다. 관록과 노련미까지 느껴지는 무대였습니다.
앙코르곡으로 화려한 기교와 강건한 타건을 요구하는 쇼팽의 연습곡 작품번호 10 중 12번 ‘혁명’을 거칠고 힘차게 연주했습니다. 2부에선 먼저 시벨리우스의 최고 걸작으로 꼽히는 교향곡 7번을 완벽에 가까운 템포 변화와 밀도 높은 앙상블로 들려줬습니다. 초반과 중반, 후반에 현악을 뚫고 나오는 트롬본의 주제 선율 연주가 일품이었습니다.
이어 라벨의 교향악적 춤곡 ‘라발스‘와 앙코르로 스트라빈스키의 ‘불새’ 모음곡 중 자장가와 피날레를 연주했습니다. 이날 연주회의 백미로 꼽을 만했습니다. 연주자 개개인의 뛰어난 기량과 파트 간 균형 잡힌 합주력은 결은 다르지만 화려한 오케스트레이션과 역동적인 리듬, 다채로운 음색이 빛나는 두 작품의 진미를 맛보게 했습니다. 연주효과가 뛰어난 앙코르가 끝나자 관객 대부분은 기립박수로 화답했습니다.
LG시그니처홀은 이날 클래식 공연장으로서 성공적으로 데뷔했습니다. 다만 처음 들어본 공연장의 자연음향은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무엇보다 소리가 공연장과 공명(共鳴)하며 울리는 정도가 약했습니다. LG아트센터에 따르면 이 공연장의 소리가 반사되는 잔향 길이는 1.2~1.85초로 일반적인 클래식전용 음악홀에 비해 짧은 편입니다. 여기에 무대와 객석의 간격도 좁습니다.
제가 앉은 자리가 1층 뒤쪽이었는데도 무대와 상당히 가깝게 느껴졌습니다. 잔향이 작고 무대도 가까워서 그런지 악기가 내는 소리 중 공연장의 울림통을 거치지 않고 귀에 직격하는 비중이 높았습니다. 울림이 좋은 관악기들의 독주 파트는 또렷이 들렸던 반면 악기간 소리가 잘 섞이지 않거나 건조한 ’생소리‘처럼 들린 대목도 있었습니다.
협연곡에서 독주와 오케스트라의 앙상블이 연주 초반에 잠시 어색하게 느껴졌거나, 풍성하고 깊이있는 현악 앙상블이 흐르는 시벨리우스 교향곡 7번의 만족도가 상대적으로 떨어졌다면 음향의 탓이 큽니다.
조성진이 앙코르로 미묘한 뉘앙스를 잘 살려야 하는 서정적인 소품이 아니라 화려한 연주기교를 요구하는 곡을 택한 것은 공연장 음향 환경도 고려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하지만 개관 전 시험 공연에서 일부 지적이 나왔던 것처럼 우려할 만한 수준은 아니었습니다. 첫술부터 배부를 수는 없는 법입니다. 예술의전당 콘서트홀과 롯데콘서트홀 등 대부분의 클래식전용홀도 개관 후 지금의 음향 환경을 갖추는데 꽤 많은 시간이 걸렸다고 합니다.
이제 갓 문을 연 공연장인만큼 향후 다양한 공연을 통해 음향 반사판이 숙성되고, 잔향 장치 등을 미세 조정해 나간다면 개선의 여지가 충분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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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태형 문화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