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킹달러' 파고에…엔화가치 32년 만에 최저

달러당 147엔 돌파

버블경제 붕괴 수준으로 하락
日銀 "美보다 경기회복 느려"
마이너스 금리 고수 재확인

아시아 각국 통화가치 방어에
외환보유액 금융위기 이후 최저
달러 대비 엔화 가치가 147엔 선마저 무너지며 32년 만의 최저치를 기록했다. 지난달 말 일본 정부는 24년 만에 엔화를 매수하는 방식으로 외환시장에 직접 개입했다. 그럼에도 한 달도 지나지 않아 통화가치가 버블(거품)경제 붕괴 당시 수준까지 떨어졌다.

13일(현지시간) 뉴욕 외환시장에서 달러당 엔화 가치는 147.66엔까지 하락했다. 버블 붕괴로 엔화 가치가 160엔 수준으로 떨어졌던 1990년 8월 이후 32년 만에 가장 낮다. 전날 발표된 미국의 9월 소비자물가지수(CPI)가 1년 전보다 8.2% 올라 시장 예상치를 뛰어넘은 것이 영향을 미쳤다.

“일본 경제 부실 드러나”

‘물가와의 전쟁’을 선언한 미국 중앙은행(Fed)이 또다시 기준금리를 대폭 올리고, 미국과 일본의 금리가 확대되는 시나리오가 시장에서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졌다는 분석이다.

올초 115엔이었던 달러당 엔화 가치는 9개월여 만에 32엔 하락했다. 일본의 환율제도가 변동환율제로 이행한 1973년 이후 가장 큰 낙폭이다. 달러의 독주가 계속되면서 유로와 파운드 등 나머지 주요 통화도 약세를 나타내고 있다. 일본은 4%포인트 가까이 벌어진 미·일 금리 차에 취약한 경제구조마저 노출되면서 통화가치가 더욱 큰 폭으로 하락했다.니혼게이자이신문은 “일본은행만 금융정책을 정상화하지 못하는 데서 일본 경제의 부실함이 드러났다”고 지적했다. 수입에 의존하는 에너지 조달 구조와 제조업 생산시설의 해외 이전으로 인해 무역수지 만성 적자가 걷잡을 수 없는 엔화 매도세를 만들고 있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구로다 하루히코 일본은행 총재는 이날 기자회견에서 “일본 경제는 미국보다 회복 속도가 늦기 때문에 금융긴축 정책으로 돌아서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며 마이너스 금리 정책을 계속할 것임을 재확인했다. 구로다 총재는 스즈키 준이치 재무상과 함께 주요 20개국(G20) 재무장관·중앙은행 총재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미국 워싱턴DC를 방문 중이다.

스즈키 재무상은 이날 “투기세력에 의한 환율의 과도한 변동은 용인할 수 없다”며 “적절한 대응을 취할 것”이라고 말했다. 대규모 금융완화 정책은 계속하되 외환시장에는 또다시 개입할 수 있음을 시사한 것이다. 그러나 시장 참가자들은 일본 정부의 개입 효과를 의문시하고 있다. 미·일 금리 차 확대라는 구조적인 요인을 제거하지 않는 한 엔화 약세를 막을 방법은 없기 때문이다.

환율 방어 나선 아시아

강달러로 인한 통화 가치 하락은 일본만의 고민이 아니다. 아시아 국가들은 자국 통화 가치를 지키기 위해 외환보유액을 대거 소진하고 있다. 블룸버그통신은 금융정보업체 엑상트데이터를 인용해 중국을 제외한 아시아 국가들이 올 들어 지난달까지 외환보유액 중 890억달러(약 127조원)를 사용해 환율을 방어했다고 보도했다. 글로벌 금융위기가 일어났던 2008년 이후 14년 만에 최대 규모다.

달러화 강세가 두드러졌던 지난달 특히 많은 자금을 썼다. 이들 국가는 지난달에만 500억달러를 투입했다. 이는 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대유행) 초기인 2020년 3월 이후 가장 많은 액수다. 500억달러 중 일본이 약 200억달러를 썼다. 나머지 300억달러가량은 한국과 홍콩, 인도,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필리핀, 싱가포르, 대만, 태국 등이 사용한 것으로 집계됐다. 한국은 170억달러를 투입했다고 블룸버그는 전했다.

도쿄=정영효 특파원/이고운 기자 hugh@hankyung.com

핫이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