英 감세정책 또 철회…재무장관 전격 경질

英총리, 정책 실패 일부 인정

"미니예산, 예상과 다른 결과"
19%로 동결하려던 법인세율
예정대로 25% 인상하기로
리즈 트러스 영국 총리가 14일 시장에 무릎을 꿇었다. 그는 최근 영국을 비롯한 세계 금융시장 불안 원인이 된 감세안의 핵심 중 하나인 법인세율 동결을 철회하겠다고 나섰다. 감세안을 주도한 쿼지 콰텡 재무장관은 취임 38일 만에 경질당했다. 영국 정계에서는 트러스 총리의 정치 생명도 매우 위태롭다는 전망을 내놓고 있다.

이날 트러스 총리는 기자회견을 열고 “법인세율 동결 계획을 철회하기로 했다”며 “법인세율을 25%로 인상할 것”이라고 말했다. 법인세율 동결은 트러스 내각이 지난달 23일 발표한 미니 예산에 포함된 감세안 가운데 가장 비중이 큰 안이다. 전체 감세 규모(450억파운드) 중 40%인 180억파운드가 법인세 관련이었다. 원래 영국은 법인세율을 내년 4월부터 현 19%에서 25%로 인상할 예정이었으나, 트러스 총리는 이를 백지화하고 세율을 현행대로 유지하는 안을 밀어붙였다. 그의 감세 정책으로 영국 금융시장은 한때 혼란에 빠졌다.

트러스 '굴욕적인 2차 유턴'…법인세율 동결 철회

14일(현지시간) 리즈 트러스 총리는 “미니 예산이 시장 예상과는 다른 결과를 낳았고, 우리의 임무를 수행하는 방식이 바뀌어야 한다”며 정책 실패를 일부 인정하는 듯한 발언을 했다. 또 다른 감세안인 소득세 기본세율 인하 등과 관련해선 입장을 밝히지 않았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트러스 총리의 이날 발표를 ‘굴욕적인 유턴’이라고 평가했다. 트러스 총리는 ‘제2의 마거릿 대처’를 표방하며 대규모 감세를 통한 소비 및 투자 활성화를 목표로 해왔다. 그러나 감세 정책이 영국 재정을 악화시킬 것이라는 우려가 일면서 영국 파운드화 가치가 사상 최저 수준으로 폭락하고 영국 국채 가격이 급락(금리 급등)하는 등 혼란이 일었다. 영국 금융시장 불안은 세계로 전이되며 우려를 키웠다. 이에 지난달 28일 영국 중앙은행(BOE)은 상황을 진정시키기 위해 장기 국채를 2주일간 매입하겠다는 긴급 시장 개입을 선언했다.사태가 심상치 않자 쿼지 콰텡 재무장관은 이달 3일 이른바 ‘부자 감세’ 논란을 일으킨 소득세 최고세율 인하(45%→40%)를 포기하며 1차 유턴했으나 시장 반응은 냉담했다. 여기에 BOE가 긴급 조치를 예정대로 14일에 종료한다는 입장을 확고히 하면서 트러스 총리는 벼랑 끝으로 몰렸다. 트러스 총리가 BOE의 개입이 끝나는 이날 공식적으로 2차 유턴을 택하며 시장에 굴복한 이유다.

트러스 총리는 이날 감세 정책 실패 책임을 물어 콰텡 재무장관을 경질했다. 38일간 임기를 수행한 그는 영국 역사상 두 번째로 단명한 장관이라는 기록을 세우게 됐다. 이날 콰텡 재무장관은 미국에서 열린 주요 20개국(G20) 재무장관 회의 일정을 단축하고 긴급 귀국했다가 경질 통보를 받았다. 콰텡 재무장관과 함께 감세안을 설계한 크리스 필립 재무부 수석부장관은 국무조정실로 자리를 옮기는 좌천 인사를 당했다. 콰텡 재무장관의 후임으로는 제러미 헌트 전 외무장관이 내정됐다. 트러스 총리는 헌트 내정자에 대해 “경제 고성장 및 낮은 세율의 필요성이라는 나의 열망을 공유한다”고 발언, 그가 진정한 유턴을 결정한 것인지 의구심을 나타내기도 했다.

트러스 총리는 기자회견에서 총리직을 유지할 이유를 묻는 질문이 나오자 “더 성장하고 더 번영하는 영국을 만들고자 한다”고 말했다. 현지 언론들은 트러스 총리가 자신의 생존을 위해 콰텡 장관을 경질했지만, 결국 그 역시 최종적으로는 책임을 회피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고 있다. 총리로서 리더십이 심각하게 훼손됐기 때문에 그 역시 취임 한 달여 만에 축출당할 가능성이 크다는 뜻이다.트러스 총리는 지난달 6일 취임했다. 미니 예산이 발표된 뒤 시장에서 줄기차게 감세로 부족해질 세수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해명을 요구했지만, 트러스 내각이 사실상 묵살하자 소통 능력에 문제가 있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BBC는 트러스 총리가 이끄는 보수당 중진 정치인들이 곧 공개적으로 총리의 사임을 요구할 예정이라고 보도했다. 영국 노동당과 자유민주당 등 야당도 총리가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고운 기자 cca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