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통기한'보다 긴 '소비기한' 도입…식품 폐기 정말 줄어들까 [하수정의 베르니케 영역]

한경 DEEP INSIGHT

이때까지 팔아도 된다는 '유통기한' 대신
먹어도 이상 없는 소비기한, 두달 뒤 시행
포장 찍어놓은 업계 위해 1년간 계도기간

정부 '식품 폐기비용' 1兆 감소한다지만
업계는 "식품 기한 당장 늘리기 어려워
개방형 냉장고 문 설치 비용 등도 부담"
누구나 식품을 구매하고 섭취할 때 유통기한을 확인한다. 주부들은 유통기한이 되도록 길게 남은 소시지를 찾아 구매한다. 편의점 주인은 유통기한이 임박한 삼각김밥을 폐기 처분 바구니에 담는다. 냉장고에 보관하고 있던 치즈가 유통기한이 지나면 아무리 아이가 좋아하는 간식이라 해도 쓰레기통에 버린다.

오랜 기간 ‘불가침의 존재’로 여겨졌던 유통기한이 내년부터 사라진다. 1985년 도입 후 38년 만이다. 대신 소비기한이 도입된다. ‘소비해도 되는 기한’을 뜻한다. 유통기한이 판매자 중심의 개념인 반면 소비기한은 ‘먹어도 이상이 없는 기한’을 말하는 소비자 중심의 개념이다. 제품마다 다르겠지만, 소비기한이 유통기한보다 20~50%가량 길다는 게 식품업계의 분석이다.

38년 만의 변화…유통기한→소비기한

정부는 내년부터 소비기한 제도가 시행됨에 따라 식품 폐기 등에 따른 비용이 연간 1조원가량 줄고 탄소배출 저감 효과도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하지만 유통·식품업계에선 소비기한 제도가 도입되더라도 현재 표시된 기한을 늘리지 않으려는 분위기가 감지된다. 제도가 시행되기도 전에 실효성 논란이 나오는 배경이다.

18일 식품의약품안전처에 따르면 내년 1월 1일부터 소비기한 표시 제도가 시행된다. 지난해 8월 유통기한 대신 소비기한을 표시하는 내용으로 ‘식품 등의 표시·광고에 관한 법률’이 개정된 데 따른 것이다. 소비기한은 기존에 유통기한이 적용된 모든 제품에 도입된다. 다만 환경에 따라 변질할 가능성이 높은 흰 우유는 예외적으로 2031년부터 소비기한을 적용하기로 했다.

당장 유통기한이라는 단어가 찍힌 포장을 바꾸기 어려운 업체들을 위해 1년의 계도기간이 주어졌다. 식약처는 지난해 8월 개정안을 공포하면서 “유예기간을 줄 수 없다”며 강공책을 폈지만, 기업들이 잇따라 불만을 제기하자 계도기간을 도입하는 것으로 한발 물러섰다.이에 따라 내년부터 2024년까지 2년여에 걸쳐 대대적으로 식품 포장이 교체될 전망이다. 계도기간이 끝난 2024년부터는 유통기한을 표시하면 시정명령이 내려진다. 소비기한을 제대로 표시하지 않거나 변조하는 등 관련 규정을 위반할 경우 제품 폐기, 영업 정지, 제조 정지뿐 아니라 영업 허가·등록 취소 처분까지 받을 수 있다.
그래픽=전희성 / 사진=김범준 기자

“식품 폐기 비용 1조원 감축 효과”

그동안 환경단체와 학계 일각에서는 “유통기한을 폐지하고 소비기한을 도입하자”고 주장해 왔다. 소비기한을 도입하면 음식물 쓰레기가 줄고 환경 보호에 도움이 될 것이란 이유에서다.통상 소비자들은 유통기한을 섭취할 수 있는 기한으로 인식한다. 이에 따라 유통기한은 지났지만, 먹어도 문제가 없는 멀쩡한 식품이 불필요하게 폐기되고 있다는 지적이 많았다.

식약처에 따르면 국내에서 버려지는 식품 폐기량은 연간 548만t으로, 축구장 100개를 합친 면적을 덮는 규모에 해당한다. 처리 비용은 매년 1조960억원에 이른다.

식약처는 소비기한 도입으로 식품 폐기가 줄어 소비자는 연간 8860억원, 기업은 연간 260억원의 편익이 발생할 것으로 분석했다. 음식물 쓰레기 처리 비용 감소 등까지 고려하면 연간 약 1조원의 비용 감축 효과가 있을 것이란 예측이다. 오유경 식약처장은 지난 7월 한국식품과학연구원 소비기한연구센터 개소식에서 “내년부터 소비기한 표시 제도가 시행되면 식품 폐기 감소로 인한 탄소중립 실현에 크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국제적 추세에 맞추기 위해 소비기한을 도입한 측면도 있다. 유럽과 미국, 일본, 호주 등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은 모두 소비기한을 적용하고 있다. 미국은 사업자가 소비기한과 유통기한을 선택해 표시할 수 있다. 국제식품규격위원회(CODEX)는 “소비자가 유통기한을 식품 폐기 시점으로 오인할 수 있다”며 소비기한 사용을 권고하고 있다.

폐기 시점으로 오인된 유통기한

지금까지 국내에선 식품에 세 가지 방법으로 기한을 표시해왔다. 우선, 설탕이나 빙과류, 얼음 등 잘 부패하지 않는 식품은 제조일자(date of manufacture)만 표시하면 된다. 유통기한이 없는 식품들이다.

품질유지기한(best before date)도 있다. 장기간 보관해도 급격한 품질 변화 우려가 없는 장류나 레토르트 식품, 통조림에 적용한다. 품질유지기한은 1985년 도입된 유통기한보다 22년 뒤인 2007년 시행됐다. 끝으로 유통기한(sell by date)이다. 가공식품의 90% 이상은 유통기한을 표시한다. 심지어 품질유지기한 적용 대상인 간장, 된장뿐 아니라 제조 일자만 표시해도 되는 설탕도 유통기한을 쓰는 경우가 많다. 식품업체들이 유통이나 보관 과정에서 변질 등 문제가 발생할 것을 우려해 판매 기한이 더 짧더라도 유통기한을 선택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통기한은 식품 제조일로부터 소비자에게 판매, 유통될 때까지 허용되는 기한이다. 식품을 먹을 수 있는 기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유통기한이 지나면 버려야 한다’는 인식이 불문율로 받아들여져 왔다. 한국외식산업연구원에 따르면 식약처·농림축산식품부 조사에서 응답자의 57%가 “유통기한이 지난 식품은 폐기한다”고 답했다.

유통기한보다 긴 소비기한

내년부터 새롭게 적용되는 소비기한은 유통기한보다 느슨한 제도다. 유통기한과 소비기한의 차이를 이해하기 위해선 ‘품질안전한계기간’이란 개념을 알아야 한다.

품질안전한계기간은 식품에 표시된 보관 방법을 지켰다는 것을 전제로 소비자가 먹을 수 있는 최장 기한이다. “품질안전한계기간이 끝나면 변질이 시작돼 먹으면 안 된다”고 이해하면 쉽다. 제품별 실험을 통해 이 기간을 설정하게 된다. 각 사업자가 유통기한과 소비기한을 정할 때는 품질안전한계기간에 적절한 안전계수를 곱해 산출한다. 유통기한을 품질안전한계기간의 60∼70%(안전계수 0.6~0.7)로 잡는다면, 소비기한은 80∼90%로 정해진다.

예를 들어 호두파이의 품질안전한계기간이 냉장 상태에서 10일이라면 같은 보관 조건에서 유통기한은 6~7일, 소비기한은 8~9일로 산출되는 식이다. 현행 식약처 고시에 명기된 권장 유통기한을 살펴보면 상온(15~25도)에서 빵은 5일, 떡은 1일 이내에 유통이 가능하다. 냉장(10도 이하) 상태에서 두부(살균제품)의 권장 유통기한은 제조일로부터 15일이다.

한국소비자원은 소비기한을 적용할 경우 식빵은 유통기한보다 20일, 두부는 무려 90일이 늘어난다는 분석을 내놓은 바 있다. 참치캔은 5~7년 정도를 유통기한 설정 가능 기간으로 보고 있는데, 소비기한은 유통기한보다 10년 더 늘릴 수 있다는 예측도 나왔다.

다만 이 같은 수치는 유통·보관 환경이 양호할 때 가능하다는 전제 조건이 깔려 있다. 최지연 한국식품연구원 식품분석센터 연구원은 “소비자원에서 한 실험은 모두 0~5도에 해당하는 냉장 상태에서 이뤄져 유통, 판매 온도와 가정 보관 온도에 따른 차이가 있을 수 있다”며 “소비기한 도입과 함께 식품 관리 온도 기준을 다시 설정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식품 기한 늘려도 안전할까

현행 규정상 식품 냉장 보관 기준은 0~10도다. 냉동온도는 영하 18도다. 상온은 15~25도, 실온은 1~30도로 규정돼 있다. 한국은 해외 기준보다 온도가 높은 편이다.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에선 냉장 보관 온도를 5도 이하로 유지하고 있다.

그런 만큼 소비기한 도입이 효과를 내기 위해선 식품 보관 온도 기준을 낮추고 유통·보관 관리를 강화해야 한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대형마트, 백화점 등 유통회사가 아닌 골목 식료품 가게 등 영세업체는 보관 온도가 일정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소비기한 도입으로 판매 기간이 늘어날수록 식품 품질이 떨어질 가능성이 높아질 수 있다. 식약처 관계자는 “냉장 보관 기준을 현재 10도에서 5도로 강화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며 “냉장식품 콜드체인 운영 가이드라인을 조만간 마련하고 오픈형 냉장고 문 달기 사업도 추진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식약처는 제품 유형별로 ‘권장 소비기한’을 마련하는 방안도 추진 중이다. 소비기한을 결정하는 것은 각 사업자지만, 일종의 가이드라인을 사전에 제시한다는 차원이다. 식약처는 이와 관련해 4년간 100억원의 예산을 들여 권장 소비기한 설정을 위한 실험을 할 예정이다. 올해 빵, 떡 등 50개 유형에 대해 권장 소비기한을 설정해 공개하고, 향후 4년간 200개 유형까지 확대하기로 했다.

유통·식품업계에선 실효성 논란

유통기한 폐지와 소비기한 도입이 두 달 앞으로 다가왔지만, 유통·식품업계에선 회의적인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소비기한을 크게 환영할 것이란 정책당국의 당초 예상과는 다른 반응이다.

대부분 기업은 내년에 소비기한 제도가 도입되더라도 당장 실질적 식품 유통기한을 늘리기 어렵다는 분위기다. 유통기한이란 단어를 소비기한으로 바꿔 달 뿐 표기 날짜는 지금과 변함이 없을 것이란 얘기다. 식품업계 관계자는 “식약처의 권장 소비기한이 앞으로 4년에 걸쳐 단계적으로 나오는 마당에 기업이 자체적으로 소비기한을 늘려놨다가 문제가 발생하면 모든 책임을 떠안게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실제로 올 하반기 제품을 리뉴얼하면서 미리 소비기한을 도입한 식품업체는 기존 유통기한과 동일하게 제품 기한을 표시하고 있다. 동원F&B는 이달부터 ‘덴마크 드링킹 요구르트’ 6종에 유통기한을 없애고 소비기한을 표기하고 있다. 이 제품들의 유통기한은 제조일로부터 16일이었고, 이달부터 적용한 소비기한도 동일한 16일이다. SPC삼립도 카스텔라, 식빵, 샌드위치, 호빵 등에 소비기한을 시범 운영하고 있지만 유통기한보다 표시 기한을 늘리지 않았다. 미리 적용한 소비기한은 단팥호빵 6일, 피자호빵 5일로 예전과 같다.

고의로 악성 민원을 제기하는 블랙컨슈머의 기승 가능성도 기업엔 고민거리다. 유통업계 관계자는 “식품 기한 표시가 달라지는 것에 맞춰 소비자 민원도 급증할 수 있다”며 “식품 유통 보관 기한이 늘어날수록 환경 변수가 다양해지고 발생할 수 있는 위험도 커진다”고 설명했다.

무엇보다 관련 업계에선 식약처가 추진하는 냉장 시스템 개선에 대한 부담을 토로하고 있다. 냉장 온도를 낮출수록 에너지 비용이 커지는 데다 오픈형 냉장고에 문을 다는 것도 소비자의 접근성 측면에선 부정적 효과가 나올 수 있어서다. 편의점업계 관계자는 “편의점주들은 자영업자이기 때문에 정부 방침보다는 매출을 우선한다”며 “담배 광고물을 가리기 위한 시트지에 반발한 것과 같이 냉장고 문 달기 역시 또 다른 규제로 받아들이게 될 것”이라고 했다.

업계에선 소비기한 제도가 시행되기도 전에 실효성 논란이 일고 있다. 한 식품업체 연구소 관계자는 “현업에서조차 소비기한에 대한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고, 소비자들은 이보다 더 이해도가 낮은 상태에서 제도를 서둘러 도입했다”며 “식품 폐기율을 낮추고 환경을 보호하겠다는 정책 효과가 제대로 나타날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식약처 관계자는 “초기 시행착오가 있을 수 있지만 점차 소비기한 제도가 안착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하수정 유통산업부 기자 agatha77@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