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주에게 물려줄 아버지 고사성어] 물은 절대로 앞서가지 않는다

한경닷컴 더 라이피스트
사진=게티이미지뱅크
어릴 때 싸움은 코피가 나면 끝난다. 초등학교 고학년 때다. 그날도 그랬다. 나보다 한 뼘이나 키가 더 큰 동급생에게 얼굴을 한 대 맞자마자 바로 코피가 터졌다. 집에 오자 아버지가 이유를 물었다. 나이는 한 살 위지만 한 해 꿇어 같이 다니는 동급생이 형이라고 안 한다며 때렸다고 했다. 아버지는 더 말씀하시지는 않았다.

세 아들을 두신 할아버지는 돌림자를 빼고 가운데 글자를 큰아들은 ‘헤엄칠 영(泳)’을, 둘째인 내 아버지는 ‘근원 원(源)’을, 막내에겐 ‘물 솟아 흐를 규(湀)’자를 각각 넣어 이름을 지었다. 아버지는 가장 좋아하는 글자가 ‘물 수(水)’자인 할아버지가 자식의 이름에 모두 물이 들어가는 글자를 넣었다고 했다. 집 대문의 문패가 ‘원행(源行)’과 ‘중행(仲行)’ 두 개가 걸려있었으나, 중학교 입학하고 호적등본을 떼 학교에 낼 때 아버지 이름이 바뀐 걸 제대로 알았다. 1957년. 할아버지가 47세에 돌아가신 그해 분가한 아버지는 아명(兒名)인 ‘근원 원(源)’을 버리고 ‘버금 중(仲)’자로 바꿔 개명했다. 호적등본은 그날 분가와 혼인신고, 첫째인 나와 56년생인 동생의 출생신고를 한꺼번에 했다고 나온다.

내 고조와 증조부는 97세, 80세로 장수했다. 두 분은 마흔 살이 넘어 자식을 얻었다. 할아버지는 큰아들을 18살에 얻었다. 아버지가 할아버지의 자식 이름 작명을 이렇게 풀이했다. “아마 너희 할아버지는 많이 어려워하신 거 같다. 그래서 큰아들 이름에 ‘네 마음대로 세상을 헤엄쳐 살아라’란 뜻을 담은 거 같다. 두뇌가 비상하고 탐구심 강한 막내는 샘솟는 물처럼 지혜롭게 살라는 뜻을 이름에 실어주신 거 같다.” 아버지는 당신의 이름에 대해서는 석연찮아서 했고 형님이 계시는데 ‘근원 원’자를 쓰는 데 부담을 느꼈다며 개명 이유를 설명했다. 개명을 한 계기가 있었냐고 묻고 싶지만 돌아가셔 이제는 곁에 안 계신다.

아버지는 그날 ‘맏 형(兄)’자를 먹을 갈아 붓으로 쓰고 ‘입 구(口)’ 아래 ‘어진 사람 인(儿)’을 쓴 글자라고 해자(解字)해 설명했다. “아우를 지도한다는 데서 형의 뜻으로 삼은 거다. 몸은 형과 아우 둘이지만 일기(一氣)다. 생각은 뛰어넘어도 되지만 일에는 순서가 있고 행동에는 차례가 있다. 내 차례와 내 순서가 소중하면 다른 사람의 차례와 순서도 소중하다. 봄이 오고 난 뒤에야 여름이 온다. 물은 절대로 앞서가지 않는다.” 그날 잊지 말라며 덧붙인 고사성어가 ‘수유사덕(水有四德)’이다. 제자백가 사상가인 시자(尸子) 군치편(君治篇)에 나온다. “이 땅의 모든 자연물을 깨끗하게 씻어주고 만물을 통하여 흐르게 하니[沐浴群生 通流萬物] 인(仁)이고, 맑은 것을 추구하고 탁한 것을 꺼리며 찌꺼기와 더러운 것을 쓸어버리니[揚淸激濁 蕩去滓濊] 의(義)요, 부드러운듯하나 범하기 어렵고 약한 듯하나 강한 것을 이기니[柔而難犯 弱而難勝] 용(勇)이고, 강이나 바다로 흘러 나아감에 나쁜 모든 것을 보듬지만 그 흐름이 겸손하니[惡盈流謙] 지(智)의 덕이다.”

개명하며 자식에게 물의 덕성을 새기라던 아버지는 나이 들어서도 형님인 큰아버지와 때로 의견충돌을 일으켰다. 돌이켜보니 당신께서도 그렇게 하기 쉽지 않으셨던 말 같다. 그때마다 ‘형만 한 아우는 없다’라고도 했지만, 인척 외에 다른 사람들에게는 형이라고 부르는 걸 보지 못했다. 동급생에게 형이라고 부르지 않아 맞고 온 내게 아버지는 “형이면 형답게 굴어야 형 소리를 듣는 거다”라는 말씀을 하고 싶지 않았을까 짐작해본다. 만나면 바로 ‘형님’하고 부르는 이들을 보면 화친성이 부럽지만 아직도 낯설어 나는 입에 잘 올려지지 않는다. 그러나 이 또한 공동체 규범을 지켜야 하는 데 반드시 갖출 성품이다.

<한경닷컴 The Lifeist> 조성권 국민대 경영대학원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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