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두현의 아침 시편] 19세 처녀에 빠진 73세 괴테

[고두현의 아침 시편] 19세 처녀에 빠진 73세 괴테


마리엔바트의 비가(悲歌)
꽃이 모두 져버린 이날
다시 만나기를 희망할 수 있을까?
천국과 지옥이 네 앞에 두 팔을 벌리고 있다.
사람의 마음은 얼마나 변덕스러운지!
더 이상 절망하지 말라! 그녀가 천국의 문으로 들어와
두 팔로 너를 안아주리라.
(……)

가볍고도 우아하게, 맑고도 부드럽게
근엄한 구름 합창단이 천사처럼 하늘에 떠 있다.
파란 하늘 저편에 마치 그녀를 닮은 듯한,
연한 향기로 만든 날씬한 모습이 솟는구나.
너는 즐겁게 춤추는 그녀를 본다.
사랑스러운 중에서도 가장 사랑스러운 모습.
(하략)


* 괴테(1749~1832) : 독일 시인, 극작가, 정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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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2년 6월, 73세의 괴테는 휴양지 마리엔바트로 향했습니다. 몇 달 전 병으로 혼수상태까지 갔지만, 언제 그랬느냐는 듯 생기가 돌았지요. 오래전 부인을 잃고 홀로 지내는 동안 뻣뻣해진 심신에 물이 오르는 듯했습니다.

‘늙은 베르테르’의 사랑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그가 19살짜리 울리케와 사랑에 빠진 것입니다. 어린 날 폴짝거리던 소녀가 이렇게 아름다운 아가씨로 성장했다니! 홀린 듯 바라보는 괴테의 눈빛을 맞받는 초록색 눈동자와 목덜미에서 팔로 흘러내리는 부드러운 곡선, 게다가 가장무도회에서 미리 짠 듯 베르테르와 로테의 분장을 하고 들어선 두 사람….

그의 마음속에서 뜨거운 용암이 분출했습니다. “왜 우리는 이제야 만났을까?” 그는 조심스레 결혼을 상상했고, 실제로 청혼하기에 이르렀죠. 주변에서는 난리가 났습니다. 온 독일이 떠들썩했지요.그러나 그는 구체적인 계획을 하나씩 세워가며 헌신적인 남자의 모습을 보여주려고 노력했습니다. 울리케에게는 사랑의 확신과 함께 달콤한 시를 속삭였지요. 훗날 ‘마리엔바트의 비가’라는 이름으로 알려질 긴 시는 그렇게 시작됐습니다.

첫 키스를 나눈 날 그는 책상에 앉아 감정의 홍수를 다스리며 시의 운을 골랐죠.
‘오래전부터 날 매혹시킨 당신,/ 난 이제 새로운 인생을 느끼네./ 달콤한 입이 우리를 다정하게 바라보네./ 우리에게 입맞춤을 선사한 그 입이.’

울리케의 어머니는 무척 당혹스러웠습니다. 딸을 젊은 남자와 짝지어주길 바라는 건 당연한 일이죠. 그 와중에 울리케와 산책하던 괴테가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울리케의 눈에 자신이 뭍에 내동댕이쳐진 물고기처럼 보였을까 봐 그는 괴로워했습니다.휴가가 끝나고 각자 집으로 돌아가면서 둘은 다시 만나자고 굳게 약속했지만, 울리케의 어머니는 망설였고 시간은 계속 흘렀지요. 그러던 중 울리케 가족이 괴테가 사는 곳 근처까지 왔다가 그에게 알리지도 않고 돌아갔습니다. 우연히 마차 안에서 그 모습을 본 괴테의 마음은 찢어지는 듯했죠.

95세까지 독신으로 살다 간 울리케

그는 고통 속으로 깊이 침잠했다가 정신을 차려 ‘마리엔바트의 비가’ 초고를 꺼냈습니다. 사랑의 기쁨을 노래했던 시는 어느덧 슬픈 비가로 바뀌었지요. 그는 특별히 고른 종이에 사흘 동안 글씨를 써서는 아무도 보지 못하도록 직접 제본까지 했습니다. 그리고 붉은 모로코가죽으로 덮은 뒤 비단 끈을 묶어 보관했습니다.

이후 그는 필생의 작업에 착수해 여든 살 무렵 『빌헬름 마이스터의 편력 시대』와 『파우스트』를 완성했지요. 열아홉 처녀를 얻으려고 방황했던 ‘늙은 베르테르’의 사랑이 청년 시절의 열정을 다시금 불러냈던 것일까요. 그는 이 두 작품 역시 봉인해서 한동안 세상에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이들의 러브스토리는 비극으로 끝났지만 둘은 평생 서로를 잊지 못했지요. 95세까지 독신으로 산 울리케는 죽기 전날 밤 편지 꾸러미를 꺼내 태워달라고 했습니다. 괴테의 편지였죠. 그러고는 재를 은 상자에 봉해 관 속에 넣어달라고 부탁한 뒤 새벽 어스름 빛 사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고두현 시인·한국경제 논설위원 : 199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늦게 온 소포』,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 『달의 뒷면을 보다』 등 출간. 시와시학 젊은시인상 등 수상.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